시(詩)/문정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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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영 - 독작시(詩)/문정영 2021. 6. 29. 16:09
태양과 대작 중이다 먼저 타오르는 사람이 자기 행성을 떠나기로 했다 아침노을 한 잔에 먼저 하늘이 불콰했고, 제빛에 눈이 부신 태양은 고개를 돌리고 바람을 마셨다 찬바람 한 잔에 늦가을이 취했다 저녁은 태양이 마실 수 없는 독주 날짜 변경선을 넘어가기로 했다 먼여행은 혼자 즐기는 낮술 같은 것 자꾸 요일을 바꾸며 태양과 술잔을 부딪쳤다 태양이 떨어지면 나도 저무는 것 이별과 연민은 몸의 어느 곳에도 새길 수 없는 문신 지금 술에 진다면 일찌감치 소멸로 가는 길 너에게로 답이 건너가기 전에 나는 자꾸 어지러웠다 빛에 타버린 나비의 날개가 술잔에 떨어졌다 너보다 내가 먼저 타버리기로 작정했다 (그림 : 이홍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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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영 - 저녁시(詩)/문정영 2020. 4. 2. 08:43
그때 그늘이란 말은 당신 저편에 있지 흰 수염의 검은 고양이 나비야, 불러도 컴컴한 능소화 같다 불빛 잠든 창가로 천천히 다가와, 수염으로 살아 있는 것들의 불편을 만지고 당신은 모래보다 가벼워, 캄캄해지기 직전 다시 흘러내린다 한 사람의 걷는 소리가 희미하다 이름을 잊은 열매가 쓰다는 것만 기억나고 하루는 몇 마디 말로 건너도 고양이처럼 우두커니 온다 그게 구겨지기 전이라서 불빛의 귀가 넓다 오후 7시는 능소화 지기 전의 두루마리구름 펼쳐진 모래가 내내 캄캄한 막을 세우고 있지 나는 매일 당신의 잠든 그늘 (그림 : 예진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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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영 - 자전거도둑시(詩)/문정영 2020. 4. 2. 08:41
사슬 묶는 것을 잊어 버렸다 바퀴 두 개만 있으면 좁은 길도 갈 수 있다는 그는 늘 집 밖에 생각을 두었다 차라리 잘 된 것일까 나무와 나무 사이를 맴돌던 그의 바큇살이 뭉클해지던 날, 나는 그를 애써 외면했었다 다시 돌아와야 할 지점을 둔 그의 몸에서 사슬이 덩그렁거렸다 바람 없는 날에는 그리움을 불어넣었다 식은 안장은 햇살로 데우고 빡빡한 날들에 기름칠을 했다 가야할 거리는 입력하지 않았다 늘 지나치던 골목을 지웠을 뿐이다 돌아오는 길목의 사슬을 풀어버린 후 나무와 나무 사이 길 하나가 생겼다 그 길로 내 마음을 싣고 간 이 누구인가 (그림 : 안기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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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영 - 처서 무렵시(詩)/문정영 2020. 4. 2. 08:34
소낙비가 불현듯 내리면 나는 가벼운 당신을 업을까. 풀빛 물든 늦여름 개울가를 건너려면 당신과 먼저 먼 여행을 가야하는데 거기서 우리는 소낙비를 만나고, 소낙비는 당신을 내 등에 업히게 하고 내 등은 먼저 젖어서 부끄러운 내력 내보일 텐데, 그래도 등에 가만히 몸 접어 눕히는 당신이 하늘에 비추어지고 나는 듬성듬성한 길을 당신의 신발 크기만큼 걷고 싶은 것이다. 어느 별에서 떨어진 비가 여기까지 도착하기까지는 소낙비만큼 고운 것이 없다. 떨어진 이후 맑은 빛으로 바뀌어 젖은 마음들 말리기에 얼마나 좋은가. 그래서 비 그친 뒤에도 젖은 등과 가슴 맞대고 오래 풀향을 맡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오래 전부터 당신은 없고 무성한 풀만 울고 간다 (그림 : 김미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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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영 - 수건을 말리며시(詩)/문정영 2020. 4. 2. 08:20
수건 한 장, 한 장에는 기념의 글자들 있다 처음 새겼던 날들의 마음 바래고 바래어 이제 글자는 희미해지고 받침 몇 개는 올이 풀려 있다 그 순간의 기억 몇 자락만 몇 백 번 씻기고 닦여 하늘로 풀풀 나풀거린다 어머니 칠순의 글자들 지워질 무렵, 내 얼굴에도 주름 몇 개가 잡힌다 마음으로 천 만 번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글자들 주름 안에 있다 그러나 그 글자들 읽지 못하고 자꾸 지워지는 것들에 눈길 둔다 흰 바탕에 푸른 글자들 하늘로 풀풀 나풀거리는 것에 마음 둔다 닦아주지 못하고 목이 아픈 날들마저 싸안지 못하여도, 널려 있는 것만으로도 족한 것이 있다 세상 따뜻한 것들을 닦아낸 뒤에 햇빛 알갱이들 가득 품고 있는 것으로 족한 것이 있다 내 마음, 내 눈물도 자꾸 닦고 싶던 낡은 수건 한 장 내 안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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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영 - 투명인간시(詩)/문정영 2019. 2. 24. 11:52
퇴근하고 돌아오는 아버지가 오늘은 투명인간이다 어머니와 아들과 딸은 아버지를 모른 척 한다 왜 안오시냐고 딸이 투정을 부린다 아버지는 처음에는 재미있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연극이 오래 가면서 가족들은 진짜 아버지가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처음부터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투명인간이었는지 모른다 투명인간은 그렇게 혼자 버텨야 하는 사람이다 나도 그렇게 집에서 투명인간이다 아내는 보이지 않는 나에게 밥을 차려주고 옷을 내어준다 나는 투명한 몸에 밥을 꾸역꾸역 집어넣는다 옷을 입고 안경을 쓰고 신발을 신는다 장갑을 끼고 마스크를 쓰자 나는 인간이 된다 밖으로 나가면 사람들은 내 겉만 본다 밖에서는 몸을 보여주지 않는다 소리만 들려준다 나는 말소리로 사람흉내를 낸다 투명인간이 투명인간 사이로 지나간다 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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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영 - 돈화문로11나길시(詩)/문정영 2018. 6. 28. 11:47
종로3가에는 할머니 칼국수집 김 서린 유리창 같은 골목이 있다. 그 유리창에 봄이라 쓰면 골목 끝에서 능소화가 핀다. 수선집 박음질 소리에 처마들이 단단해진다. 낮은 창문의 하루를 안다면 새들의 저녁을 아는 일이다. 몇 벌의 나비를 걸어 놓은 한복집에서는 풀향이 흘러나오고 봄꽃들이 옛날 무늬처럼 피어난다. 골목이 생긴 이후 새로모신점집보다 바람이 그날의 점괘를 본다. 오르막 내리막이 없는 평운(平運)이다. 우산 하나로도 눈비를 막을 수 있는 골목에서 헤어진 연인은 다시 그 길로 들어서면 하나가 된다. 돌아서거나 비켜 갈 수 없어 길의 끝까지 가야 한다. 능소화주차장은 능소화가 져도 능소화주차장이다. 돈독(敦篤), 돈화(敦化) 도탑다는 의미가 구불구불 돌아나오는 골목에서 지난겨울 가랑눈도 어떤 깊이를 가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