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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영 - 돈화문로11나길시(詩)/문정영 2018. 6. 28. 11:47
종로3가에는 할머니 칼국수집 김 서린 유리창 같은 골목이 있다.
그 유리창에 봄이라 쓰면 골목 끝에서 능소화가 핀다.
수선집 박음질 소리에 처마들이 단단해진다.
낮은 창문의 하루를 안다면 새들의 저녁을 아는 일이다.
몇 벌의 나비를 걸어 놓은 한복집에서는 풀향이 흘러나오고
봄꽃들이 옛날 무늬처럼 피어난다.
골목이 생긴 이후 새로모신점집보다 바람이 그날의 점괘를 본다.
오르막 내리막이 없는 평운(平運)이다.
우산 하나로도 눈비를 막을 수 있는 골목에서 헤어진 연인은 다시 그 길로 들어서면 하나가 된다.
돌아서거나 비켜 갈 수 없어 길의 끝까지 가야 한다.
능소화주차장은 능소화가 져도 능소화주차장이다.
돈독(敦篤), 돈화(敦化) 도탑다는 의미가 구불구불 돌아나오는 골목에서 지난겨울 가랑눈도 어떤 깊이를 가졌겠다.
누군가 불러 눈을 감으면 속눈썹 끝에 흰 발자국이 걸렸겠다.
(그림 : 양종석 화백 - 윤보선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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