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정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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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 - 대설(大雪)시(詩)/정양 2017. 11. 14. 22:16
마을 공터에 버스 한 대 며칠째 눈에 파묻혀 있다 길들이 모두 눈에 묻혀서 아무 데나 걸어가면 그게 길이다 아무 때나 들어서면 거기 국수내기 화투판 끝에 세월을 몽땅 저당잡힌 얼굴들이 멸칫국물에 묵은 세월을 말아 먹고 있을 외딴집 앞 눈에 겨운 솔가지 부러지는소리 덜프덕 눈더미 내려앉는 소리 외딴집 되창문이 잠시 열렸다 닫힌다 잊고 살던 얼굴들이 모여 있는지 들어서서 어디 한번 덜컥 문을 열어보라고 제 발자국도 금세 지워버리는 눈보라가 자꾸만 바람의 등을 떠민다 (그림 : 신재흥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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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 - 상강(霜降)1시(詩)/정양 2017. 10. 28. 10:08
해맑게 글썽거리던 것들이 이렇게 날이 서는 수도 있구나 오뉴월에도 내린다던 그 서릿발 어렵사리 짐작하면서 서릿발 깔린 풀밭길을 햇살도 차마 비껴 딛는다 상강(霜降) : 24절기의 열여덟째로 서리가 내리는 때입니다. 맑고 상쾌한 날씨가 이어지며 밤에는 슬슬 기온이 떨어지면서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지요. 옛사람들은 상강 때 초후에는 승냥이가 산 짐승을 잡고, 중후에는 풀과 나무가 누래지고 떨어지며, 말후에는 겨울잠을 자는 벌레가 모두 땅에 숨는다고 했습니다 (그림 : 박정렬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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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 - 백초즙시(詩)/정양 2016. 4. 9. 21:51
초여름 산길에서 풀 뜯는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다 내 또래쯤 되는 것 같다 백초즙(百草汁)을 담그려고 풀을 뜯는다고 한다 콩알 백개 헤아려 품에 넣고 풀 한무더기 뜯을 때마다 쉼표처럼 콩알 하나씩 그 자리에 놓으면서 품안에 콩알 다 없어질 때까지 나무 풀이나 보이는 대로 뜯는다는데 풀 한가지에 한 소쿠리씩 백 소쿠리를 항아리에 삭혀 우려낸 그 백초즙이 묵은 해소도 가슴애피도 소갈증도 몰매 맞은 삭신도 다 풀려버리는 명약 중의 명약이라는데 이렇게 아무 풀이나 뜯다가 독초라도 섞이면 어떡하냐고 했더니 못난 사람 못된 사람 다 소용 닿듯이 맛만 보아도 대번에 숨이 넘어가는 소문난 독초들이 섞여야 더 약이 된다며 나를 돌아보며 확인하듯 할머니는 두어 번이나 고개를 끄덕인다 못난 풀 못된 풀 모진 풀 짓밟아도 뜯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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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 - 보리방귀시(詩)/정양 2015. 12. 5. 11:20
보리밥 먹는 여름철에는 방귀 많이 뀌는 게 큰 자랑이다 상학이 방귀는 동네뿐만 아니라 5학년 1반만 아니라 전교생이 다 알아준다 상학이가 방귀 뀌는 걸 보고 담임선생님도 놀란 얼굴을 좌우로 위아래로 흔들며 몇 번이나 올림픽 금메달 깜이라고 했다 뭘 모르는 아이들은 아무 때나 상학이만 보면 방귀 좀 뀌어보라고 무턱대고 졸라대지만 사정 아는 아이들은 상학이 낯빛이 치잣물에 적신 것처럼 노랗게 질릴 때를 기다렸다 어쩌다 한 번씩 은행나무 밑에서 상학이는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엉덩이를 깐다 한꺼번에 힘을 모아 큰 소리로 터뜨리는 그런 예사 방귀가 아니다 두 손으로 오르락내리락 총 쏘는 시늉을 하면서 엉덩이를 뒤로 조금 내밀고 무릎은 엉거주춤 오므리고 불알이 달랑거리거나 말거나 엉덩이와 오금쟁이와 뱃살과 똥구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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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 - 비금도 제비시(詩)/정양 2015. 9. 28. 23:09
비금도 사람들은 집집마다 대여섯 채의 사글세를 놓고 산다 낡은 기와나 스레트 지붕을 인 가난한 집일수록 사글세를 많이 놓지만 시멘트로 지은 높은 집은 인기가 없어 한 채의 사글세도 들이지 못한다 섬마을 오월은 글 읽는 소리로 통통배가 나간다 지지위지지부지위부지시지야 처마 밑 전깃줄 빨랫줄 문간시렁 담벼락 용마름에서 화음을 이루지 못한 소리가 바닷바람에 간이 배여 오선지를 타고 선왕산으로 날아가 인동초 꽃을 피운다 새끼제비 꽃노래 가득한 오월에는 책거리하는 서당 학동들 목소리도 제비 주둥이를 닮아 노랗다 지지위지지부지위부지시지야 지지위지지부지위부지시지야 비금도에는 훈장님이 따로 없다 세들어 사는 제비들이 다 훈장님이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것이니라 비금도 사람들은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