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정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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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 - 토막말시(詩)/정양 2014. 9. 11. 16:58
가을 바닷가에 누가 써 놓고 간 말 썰물진 모래밭에 한 줄로 쓴 말 글자가 모두 대문짝만해서 하늘에서 읽기가 더 수월할 것 같다 정순아보고자퍼서죽껏다씨펄 씨펄 근처에 도장 찍힌 발자국이 어지럽다 하늘더러 읽어 달라고 이렇게 크게 썼는가 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 손등에 얼음 조각을 녹이며 견디던 시리디 시린 통증이 문득 몸에 감긴다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는 가을 바다 저만치서 무식한 밀물이 번득이며 온다 바다는 춥고 토막말이 몸에 저리다 얼음 조각처럼 사라질 토막말을 저녁놀이 진저리치며 새겨 읽는다 (그림 : 이금파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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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 - 콩밭지꺼리시(詩)/정양 2014. 9. 11. 16:46
콩밭지꺼리는 척 보면 표가 난다 농약기도 거름기도 없는 콩밭 그늘에 놀짱하게 야들야들하게 자란 열무는 솎아서 장에 내놓기 무섭게 금세 팔리곤 했다 아무것도 못 먹던 긴긴 투병의 끝자락에 콩밭지꺼리 버무려 밥 한 술 먹고 싶다던 어머니는 이런저런 주사만 맞다가 끝내 돌아가시고 어느 장터에도 요새는 그 콩밭지꺼리가 없어서 어머니 제사상에는 그냥 지꺼리밭 지꺼리로 버무린 김치를 마지못해 올리지만 언젠가는 꼭 콩밭지꺼리를 올리고 싶지만 제사상에 무슨 김치냐고 꾸중도 핀잔도 들어가면서 요새는 장터에서도 콩밭지꺼리가 뭐냐고 되묻는다고 제사 때마다 그 콩밭지꺼리로 어머니하고 몇 마디씩은 말을 나눈다 지꺼리 : 김칫거리 (그림 : 구병규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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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 - 저녁놀시(詩)/정양 2014. 7. 7. 10:22
울타리마다 내버리듯 남은 인정을 널어놓고 떠나던 길, 묵은 쌀빚 받으러 가는 고향길에 노을이 탄다 수수밭머리 낯익은 눈 녹는 모습 산기슭 들판머리로 눈 덮인 노을 노을이여, 긴 겨울잠 속에 숨어 흐르는 검은 피를 가리고 핏빛 살냄새를 가리고 횟배 앓던 유년의 어지럼증을 저 빛깔들을 거슬러오는 동화여 노을 비끼는 수수밭머리 들판머리로 왜 이리 들개처럼 내딛고만 싶은가 검은 살냄새 두르고, 외로운 짐승처럼 울고 싶은가 나에게로 오는 휴식처럼 사랑처럼, 서러운 빛깔들처럼 서러운 묵은 빚 받으러 오는 노을이 탄다 (그림 : 이황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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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 - 은행나무 배꼽시(詩)/정양 2014. 7. 7. 10:20
마재마을 날망에는 세 아름도 넘는 은행나무가 서 있는데요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 뿌리가 집집마다 골고루 뻗어 있다고 믿는데요 은행나무 아랫두리에는 예전에 사람 들어앉아 잠을 잘 만큼 커다란 구멍이 하나 있었답니다 과거에 낙방하여 낙향하던 어떤 나그네가 그 구멍 안에서 한나절이나 잠을 잔 뒤에 구멍 안쪽에 시를 한 수 써 놓고는 들 건너 찰뫼산 모퉁이를 감아흐르는 부용강물에 그만 몸을 던졌더랍니다 그런 연유로 사람들이 그 구멍을 꺼려해서인지 구멍도 점점 좁아지기 시작했다는데요 사람들 배꼽 높이만큼 파인 그 구멍을 사람들은 은행나무 배꼽이라 했고 위아래로 째져 보여서 아이들은 그냥 은행나무 보지라고도 불렀습니다 구멍이 점점 좁아졌다지만 내 어렸을 때만 해도 어깨나 허리에 감고 다니던 책보 여남은 개씩은 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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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 - 진달래 캐러왔다가시(詩)/정양 2014. 7. 7. 10:16
뜰에 옮기려고 진달래 캐러 왔다가 진달래꽃 흐드러진 산자락 삽자루 기대어 넋 놓고 꽃구경만 한다 마음 다 비운 듯이 아무리 바라보아도 아무래도 꽃들이 심상치 않다 화장기도 화냥기도 없이 그냥 바람난 바람난 게 무언지도 모르고 그냥 바람난 아슬아슬한 여자애들만 같다 누가 진실로 마음 비우고 하염없이 바라본다면 그 곁에 다가와 비로소 맘놓고 곱게 필 진달래꽃 꽂았던 삽 뽑아들고 돌아보지도 말고 그냥 돌아갈거나 그냥 돌아가고픈 속을 훤히 알고 있는지 어디 한번 일 저질러보라고 깔깔거리는 산자락마다 흐드러지는 진달래꽃 (그림 : 김설화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