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정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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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 - 철쭉밭시(詩)/정양 2014. 7. 5. 18:20
봄에 뿌려준 웃거름이 모두 풀들 차지가 된 것 같다 막된 것들이 더 잘 사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첫 장마 지나기도 전에 군데군데 철쭉들이 풀에 파묻혔다 키 큰 풀들은 철쭉보다 뿌리가 깊다 뽑으면 철쭉이 덩달아 뽑힌다 철쭉뿌리에 뒤엉킨 억센 풀뿌리를 가까스로 뜯어내고 철쭉은 도로 심는다 도로 심은 철쭉은 대체로 여름 내 시름시름 시들거린다 그러게, 왜 철쭉만 편애하냐고 기세등등한 풀들이 으시딱딱 날을 세운다 농사꾼이 일일이 풀을 탓하면 안 된다 한세상 야코죽지 말자고 시들거리는 철쭉에 가만가만 물을 준다 (그림 : 박진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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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 - 개펄냄새시(詩)/정양 2014. 7. 4. 19:57
어금니 갈아 끼우는 동안 한 달 가까이 조개 속살을 먹고 살았다 이 세상에는 무슨 조개들이 그리 많은지 노랑조개나 모시조개, 꼬막이나 생합이나 바지락말고도 이름 모를 벼라별 조개들을 먹는 김에 다 먹어 보았다 초장에 찍어 날것으로도 먹고 구워도 먹고 쌀과 녹두를 섞어 죽을 쑤어 먹기도 했다 그 중 제일로 많이 먹은 게 흔하고 값싸고 맛있는 바지락이다 먹을 때는 전혀 몰랐는데 삼시세끼 조갯살만 먹고 한 일주일 지나면서부터는 트림을 하거나 방구가 나올 때마다 희한하게도 그 속에서 매콤시큼한 개펄냄새가 나곤 했다 사람살이에 가장 요긴한 것들을 하늘은 애당초 흔전만전 차려 놓았다고 하거니와 햇빛이나 땅덩이나 물이나 공기도 물론 그렇거니와 땅에서 나는 풀 중에도 이 세상에 흔전만전 자라서 흔전만전 번지는 쑥잎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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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 - 참숯시(詩)/정양 2014. 7. 4. 19:56
간장독에 띄울 숯을 사러 읍내에 간다 나무 타다 만 게 숯인데 아무 나무토막이나 태워서 쓰자고 해도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아내는 참숯을 써야 한단다 읍내 장터를 다 뒤져도 숯이 없다 가슴속 한 세상 더글거리는 타다 만 숯덩이들은 쓸모가 없겠지 육십릿길 더 달려간 도회지 시장통에서 가까스로 숯을 만난다 휘발유 값이 몇 배는 더 들겠다 불길이 한참 이글거릴 때 바람구멍을 꽉 막아야 참숯이 된다고 참숯은 냄새도 연기도 없다고 숯가게 할아버지 설명이 길다 참숯은 냄새까지 연기까지 감쪽같이 태우나 보다 이글거리기도 전에 숨통이 막힌 내 청춘은 그나마 참숯이 되어 있는지 언제쯤 냄새도 연기도 없이 이글거릴지 어쩔지 간장독에 둥둥 떠서 한평생 이글거리지도 못할 까만 비닐봉지 속 숯토막들이 못 견디게 서걱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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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 - 가을햇살시(詩)/정양 2014. 7. 4. 19:55
산 모퉁이 빈집 바랭이풀이 토방까지 술 취한 여자처럼 쓰러져 있다 초가을 햇살이 툇마루에 걸터 앉는다 누가 보든 말든 두엄자리 옆 호박잎들은 넙죽넙죽 햇살을 받아 먹고 비탈길 칡넝쿨은 너풀너풀 그 햇살을 뒤적거리고 바랭이풀 함부로 쓰러진 텃밭에 팔랑거리는 메주콩잎이 띄엄띄엄 서서 연신 아는 체를 하고 있다 대숲에는 댓잎들이 보일 듯 말 듯 자디잘게 그 햇살을 쪼개 먹는데 해갈이하는 먹감나무는 온통 눈부시게 반짝거려서 드문드문 매달린 햇감을 감추고 있다 드문드문 매달린 햇살이 도둑질하다 들킨 것처럼 낯을 붉히며 도망도 못 가고 두근거린다 (그림 : 박항환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