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박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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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라연 - 봉지시(詩)/박라연 2021. 9. 11. 09:15
허탈할 때 뭔가 가득 찰 때도 들어갑니다 따뜻하기도 하고 서늘하기도 하죠 섭섭한 대로 봉할 수 있어서 다시 풀 수 있어서 늘 희망적입니다. 얼굴이 없으면 싶을 때도 들어갑니다 우리 나중에 봐요,라는 공간을 선물합니다 귀함을 넣어 좋은 이에게 배달하거나 처마에 매달아둘 때 세상은 더욱 눈부시죠 세상이 사라져버렸음 싶은 이유들이 한꺼번에 울 때 그 울음을 싸서 감아주는 이름입니다 울음소리에 놀란 산과 하늘과 바다도 도리없이 들어갑니다. 당신도 상처 몇됫박쯤 잘 싸서 넣어보세요 어둠을 곱씹으며 아물던 상처가 봄의 입구 쪽으로 귀를 놓을 것입니다 (그림 : 박지혜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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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라연 - 내 마음에 들어오지 마세요시(詩)/박라연 2019. 12. 16. 11:46
놓았으나 들어 올려진 꿈의 설계도 그 마음의 처마에도 종일 봄비가 내릴까 여기서의 마음이란 울음인데 팔 걷어붙이고 시작한 울음인데 아무리 허술해도 봄비쯤은 되려나? 대지의 유전자에게 내 울음을 보내면 어떨까 왜? 음……씨앗인 나를 황무지에 버려진 나를 혹시 물어다가 꿈의 마지막 회로까지는 이동시켜주려나? 라일락으로 피어날까? 하면서 봄이 다 가도록 피어나지 못해도 내 울음엔 들어오지 마세요 왜? 음………눈물에게 눈이 달려 있어서 놀라워서 눈이 멀어 산 시간의 대청소는 혼자 해야 제맛이죠 이번 생엔 뭐랄까 내 울음의 소속이 바깥일 것 같아서 왜? 음……정은 사람의 시작이니까 상처없는 길에는 마음이 없을지도 모르니까 (그림 : 이선희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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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라연 - 화음을 어떻게든시(詩)/박라연 2019. 11. 16. 11:57
어머니! 겨울이 코앞이네요 저는 세상이 모르는 흙, 추운 색을 품어 기르죠 올해 길러낸 두근거림을 따서 바칠게요 맨 처음은 개나리 다음엔 수선화 그 다음엔 꽃잔디가 제 몸을 붉게 덮었죠 두근거림을 눈치챈다는 것은 느낌의 천국이죠 여울진 꽃잔디에 목이 길어진 수선화는 군소 군락으로 번지며 나비처럼 날아요 시름을 찾아내 바꿔치기하죠 허기의 틈새에서 팬지가 올라오네요 튤립의 붉은 아침을 함께 먹죠 고요를 열고 일터의 얼룩과 서로의 석양을 어루만져요 목단과 붓꽃의 기픔이 자학에 눌린 당신 키를 찾아내면 붉은 양귀비 떼가 소나기처럼 몰려오죠 꽃들이 속속 열리고 횡렬 종대로 색색으로 깔깔대며 밥상을 차려요 어머니! 그때 우리는 보았어요 검은 탄식을 버리고 섞이며 이동하는 동작들의 눈부심을요 저는 변방을 떠도는 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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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라연 - 몽탄역시(詩)/박라연 2019. 10. 10. 08:53
밤 기차를 타본 사람은 안다 마음속엔 몇 개의 몽탄(夢灘)역 있다는 것 역사 너머 저마다 연못 있다는 것 꿈으로나 만나보는 꿈이어서 다행인 풍경 있다는 것 옛날 그림자들 걸어나와 구불구불한 생(生)의 왼편과 오른편에 달불을 켠다는 것 연꽃 눈 뜨는 순간의 떨림 수정으로 구른다는 것 앞마당에 목백일홍은 심지 마라 붉은 울음 빼내어 너, 주면 어쩔래 화룡점정(畵龍點睛)의 붓과는 눈 마주치지 마라 네, 속내 빼내어 화선지에 넣으면 어쩔래 어머니의 노래 끝날 무렵 만삭의 근심들 몸 푸는가 온몸에 반딧불 켜고 있는 저 허공 몽탄역!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 달불의 연기처럼 스며드는 지는 해도 문득 외박하고 싶어지는 첫사랑, 몽탄행(行) 열차에게 길은 꿈길뿐이라는 것 몽탄역(夢灘驛) : 전라남도무안군몽탄면 몽탄로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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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라연 - 해거리시(詩)/박라연 2019. 10. 10. 08:49
해거리를 아시는지요? 감나무, 배나무, 사과나무....... 지난해에 주렁주렁 탐스럽게 열매 열린 나무는 빈 나뭇가지에 바람만 일렁일 뿐 감도, 배도, 사과도 좀처럼 제 친구들을 만날 수 없다는 것, 그 지루한 그 쓸쓸한 한 해를 짐작해보신 적 있으신지요?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 말을 하지만 콩과 팥이 만나 살다보면 콩도 팥도 아니고 콩의 근심과 팥의 오만만을 고스란히 물려받을 수 있다는 것 근심과 오만 덩어리인 채로 이리 데굴, 저리 데굴, 굴러 다니는 한평생을 생각해보신 적 있으신지요? 해거리하는 해에 태어난 감, 사과, 배 그저 이름만 감 사과 배일 뿐 제 이름 다정하게 불러주는 이 쉽게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아시는지요? (그림 : 김한숙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