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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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 네 켤레의 신발시(詩)/이기철 2023. 1. 22. 06:53
오늘 저 나직한 지붕 아래서 코와 눈매가 닮은 식구들이 모여 앉아 저녁을 먹는 시간은 얼마나 따뜻한가 늘 만져서 반짝이는 찻잔, 잘 닦은 마룻바닥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소리 내는 창문 안에서 이제 스무 해를 함께 산 부부가 식탁에 앉아 안나 카레리나를 이야기하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누가 긴 휘파람으로 불어왔는지, 커튼 안까지 달려온 별빛으로 이마까지 덮은 아들의 머리카락 수를 헬 수 있는 밤은 얼마나 아늑한가 시금치와 배추 반 단의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싶은 사람의 전화번호를 마음으로 외는 시간이란 얼마나 넉넉한가 흙이 묻어도 정겨운, 함께 놓이면 그것이 곧 가족이고 식구인 네 켤레의 신발 (그림 : 최성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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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 봄밤시(詩)/이기철 2022. 1. 15. 18:13
가난도 지나고 보면 즐거운 친구라고 배춧국 김 오르는 양은그릇들이 날을 부딪치며 속삭인다 쌀과 채소가 내 안에 타올라 목숨이 되는 것을 나무의 무언(無言)으로는 전할 수 없어 시로 써보는 봄밤 어느 집 눈썹 여린 처녀가 삼십 촉 전등 아래 이별이 긴 소설을 읽는가보다 땅 위에는 내가 아는 이름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서까래 아래 제 이름 가꾸듯 제 아이를 다독여 잠재운다 여기에 우리는 한 生을 살러 왔다 누가 푸른 밤이면 오리나무 숲에서 비둘기를 울리는지 동정 다는 아낙의 바느질 소리에 비둘기 울음이 기워지는 봄밤 잊혀지지 않은 것들은 모두 슬픈 빛깔을 띠고 있다 숟가락으로 되질해온 생이 나이테 없어 이제 제 나이 헤는 것도 형벌인 세월 낫에 잘린 봄풀이 작년의 그루터기 위에 또 푸르게 돋는다 여기에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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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 사랑의 기억시(詩)/이기철 2022. 1. 15. 13:40
시집 한 권 살 돈이 없어 온종일 헌책방 돌 때 있었네 남문 시장 고서점, 시청 옆 헌책방 돌 때 있었네 하루에 서른 편 키 큰 서가 아래 지팡이처럼 서서 읽을 때 있었네 모두들 서럽고 쓸쓸한 말로 시의 베를 짜고 있었네 귀에는 벌 떼 잉잉거리고 눈시울엔 안개비 촉촉이 서렸었네 어쩌다 맘에 드는 시 한 편 만나면 발길 돌리지 못하고 꽃술의 꿀벌처럼 뱅뱅거리다가 주인 눈살 피해 서너 번 문을 여닫을 때 있었네 더러는 노트 조각 찢어 열 줄 시를 베꼈네 주인 몰래 책장을 찢고도 싶었으나, 이게 시인데 시는 아름다운 것인데 나를 달래며 내일 또 오지, 모래 또 오지 문을 밀고 나올 때 있었네 그때마다 엷은 등에는 시구들이 고딕으로 찍혔었네 시집 이름 기억 안 나도 머릿속에 베껴 논 시구 선명해 내일 또 와 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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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 별밭마을시(詩)/이기철 2022. 1. 15. 13:15
누군가 별을 옮겨 심어 별밭마을이 되었다 별밭마을에는 밤에도 불을 끄고 별을 켠다 별을 켜는 순서는 추억의 순서다 생텍쥐페리 알퐁소 도데 윤동주의 순이라도 상관은 없다 별을 바라보며 가슴이 두근거리는 사람은 그의 안에 아직 파랑새를 찾아 집 나서는 소년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오늘 밤 은하기차를 타고 별에 닿을 것이다 지붕 위에 올라가 별의 플랫폼을 밟을 때 미자르별이 보이지 않으면 시력검사를 해야 한다 그는 매일 밤 별밤기차를 타지만 기차가 끊어지면 어김없이 별밭마을로 돌아온다 별밭마을에는 별밤지기만이 뚜깔잎처럼 산다 (그림 : 우창헌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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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 찔레꽃 향기시(詩)/이기철 2021. 4. 21. 14:17
오월엔 찔레꽃이 핀다 감나무 잎이 푸르고 늦게 핀 대추나무잎이 초록을 길어 제 몸에 칠하면 산과 들 어디서나 찔레꽃은 핀다 흐드러지게 핀다 코를 찌르는 향기를 싣고 핀다 논과 밭 어디서나 핀다 갯가나 담장에도 핀다 버드나무 아래도 피고 상수리나무 아래도 핀다 해 뜰 때도 피고 해 질 때도 핀다 오월이 가고 유월이 와도 핀다 다듬어도 다듬어도 찔레꽃은 길들지 않는다 끊어내고 끊어내도 찔레꽃은 가지를 편다 오월의 들과 산은 찔레꽃 천지다 내 이마와 손발, 내 머리카락과 양말에도 찔레꽃 향기다 찔레꽃 향기는 들판이 뿜는 향내다 찔레꽃 향기는 들판이 밀어올리는 힘이다 (그림 : 장용림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