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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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 나의 조용한 이웃들시(詩)/이기철 2017. 8. 4. 23:23
풀뿌리가 이룩한 세상 속에 집을 짓고 그만 들어앉을까 다섯 번 생각했습니다 벌레의 도제가 되어 한 일 년 햇볕 서까래 거는 법을 배울까 석 달 동안 바장였습니다 아직 못 읽은 스무 권의 책과 멀리서 온 편지 따윌 얹어놓을 시렁과 쟁반과 간장종지 씻어놓을 선반은 아무리 오막집이라도 빠뜨릴 수 없겠지요 어떻게 살아야 여치 메뚜기에게도 이만하면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민들레 채송화는 내 집짓는데 한 봉지의 색깔밖엔 보태 줄게 없다고 조아리네요 가을 오면 귀뚜라미에게 밤마다 해금 탄주를 배울 요량입니다 옹두리에 담기는 달빛에게 인사를 빠뜨려서는 안 되니까요 붉지 않으면 피지도 않겠다고 고집하는 석류꽃에겐 꿈꾸는 것만 허용되어도 고맙다고 인사하겠습니다 노랑나비에게 빌려줄 마당 두 평이 있는 한 나는 마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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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 봄 아침엔 창문을 여세요시(詩)/이기철 2017. 3. 20. 09:42
봄 아침엔 창문을 여세요 그러면 풀들의 숨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발이 간지러운 풀들이 반짝반짝 발바닥 들어올리는 소리도 들릴 거예요 봄 아침엔 창문을 여세요 아픔처럼 꽃나무들 봉지 틔우는 소리 들릴 것입니다 햇살이 금가루로 쏟아질 때 열 마지기 논들에 흙이 물 빠는 소리도 들릴 거에요 어디선가 또옥똑 물방울 듣는 소리 새들이 언 부리 나뭇가지에 비비는 소리도 들릴 것입니다 사는 게 무어냐고 묻는 사람 있거든 슬픔과 기쁨으로 하루를 짜는 일이라고 그러나 오지 않는 내일을 위해 지레 슬퍼하지 말라고 산들이 저고리 동정 같은 꽃문 열 듯 동그란 웃음 하늘에 띄우며 봄 아침엔 화알짝 창문을 여세요 (그림 : 김순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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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 산골에 오두막을 짓다시(詩)/이기철 2017. 3. 16. 11:39
산골에 오두막을 짓다 달빛으로 기둥을 세우고 바람으로 지붕을 덮었다 우우우 몰려오는 서풍의 축하객 손님처럼 찾아온 아카시아 잎 방문 두드리는 소리 배추잎은 아직 어려 잠에 빠져 있고 수수이삭은 저 혼자 시간을 먹고 가을만큼 자랐다 얘들아 얘들아 불러도 돌아오지 않는 놀러간 개울물 오소리들이 물고 간 밤톨은 찾아볼 수 없다 전기밥솥에 쌀 안쳐놓고 사립문 열면 후욱 끼쳐오는 꿀밤나무들의 푸른 살 냄새 엄마 젖무덤 같은 산등엔 돌 지난 아이의 하얀 젖니 같은 별이 뜨겠다. (그림 : 정태영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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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 오늘은 조금만 더 희망을 노래하자시(詩)/이기철 2017. 3. 10. 09:27
미래는 저녁 창문처럼 금세 어두워지지만 작별해 버린 어제가 모두 탕진은 아니다 모래의 시간 속으로 걸어온 구두 밑창의 진흙은 숙명을 넘어온 기록이다 내 손은 모든 명사의 사물을 다 만졌다 추상이 지배하는 인생은 불행하다 명백한 것은 햇빛밖에 없다 죄마저 꽃으로 피워둘 날 기다려 삶을 받아쓸 종이를 마련하자 가벼워지고 싶어서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모든 노래를 받기 위해서 입 다무는 침묵처럼 오늘은 단추 한 칸의 가슴을 열자 오늘은 조금만 더 희망을 노래하자 (그림 : 설종보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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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 사람과 함께 이 길을 걸었네시(詩)/이기철 2016. 6. 29. 12:50
사람과 함께 이 길을 걸었네 꽃이 피고 소낙비가 오고 낙엽이 흩어지고 함박눈이 내렸네 발자국이 발자국에 닿으면 어제 낯선 사람도 오늘은 낯익은 사람이 되네 오래 써 친숙한 말로 인사를 건네면 금세 초록이 되는 마음을 그가 보는 하늘도 내가 보는 하늘도 다 함께 푸르렀네 바람이 옷자락을 흔들면 모두는 내일을 기약하고 밤에는 별이 뜨리라 말하지 않아도 믿었네 집들이 안녕의 문을 닫는 저녁엔 꽃의 말로 안부를 전하고 분홍신 신고 걸어가 닿을 내일이 있다고 마음으로 속삭였네 불 켜진 집들의 마음을 나는 다 아네 오늘 그들의 소망과 내일 그들의 기원을 안고 사람과 함께 이 길을 걸어가네 (그림 : 정지권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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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 황혼 노래시(詩)/이기철 2016. 5. 28. 23:18
저물어 도착한 곳이 그대 집이다 마른 풀이 서걱이는 곳간이라도 그대는 쉬이 편안에 당도할 수 있을 것이다 송아지들이 남긴 발자국이 그대를 안내하면 고 하라 아직 못 따라온 오후가 강을 건너느라 옷자락을 물에 적시고 있을 것이니 마음을 데우는 것이 노래만이 아님을 은빛살의 햇볕을 보면 심히 알리라 겨울강이 언제 스스로 몸푼 적 있느냐 깍지 낀 손 놓지 않아도 완강한 그의 마음 읽을 수 있어서 겨울강이니 어서 가라, 반 촉의 등불과 가끔은 살랑이는 동풍을 준비해야 하는 지금은 황혼 (그림 : 이영희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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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 검정 교복시(詩)/이기철 2016. 5. 18. 12:30
다섯 개의 단추가 수직으로 달린 검정 교복 거기에 내 열다섯 소년이 있었네 소년이라기에는 너무 많은 꿈 너무 많은 길의 분망이 문 열고 있었네 어느 어깨에 걸쳐도 알맞게 드리워져 추운 몸 따뜻이 데우는 마음의 겹옷 그리운 것들이 그 속에서 벌 떼처럼 잉잉거려도 그 하나하나의 오라기들이 내 서른 해 뒤의 생의 씨줄이 될 줄 그땐 짐작 못 했네 길 위에 서면 긴 휘파람으로 다가오던 살구꽃 같은 희망 차마 희망이라고 말하기에도 가슴 설레던 숯검뎅이 추억 그 이름만으로도 스무 해는 옛날로 돌아갈 수 있는 저 온대의 햇살인 검정 교복 (그림 : 손미량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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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 산다는 것은 누구를 사랑하는 일시(詩)/이기철 2016. 5. 18. 10:20
누군가를 기다리다 잠드는 사람 있을 듯하다 그의 눈시울이 조금 젖었을 것이다 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반가워 고개를 들면 나뭇가지가 유리창에 편지를 쓰고 낮에 익힌 말들을 잊지 않으려고 잠들기 전에 새들이 잠꼬대를 한다 낙엽이 창을 두드린다 산다는 것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 혹은 사랑했던 기억의 방으로 들어가는 일 가을엔 걸어서 낯선 이의 집에 도착하고 싶다 창을 두드리는 낙엽 소릴 들으며 그가 벗어놓은 신발에 소복소복 나뭇잎 담기는 것 보고 싶다 (그림 : 서정도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