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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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 우수의 이불을 덮고시(詩)/이기철 2013. 12. 22. 00:30
오늘도 우리 아는 이웃들은 다 무사합니다 자주 손끝에서 덧나던 희망 오래 만져서 닳고 닳은 고통들은 잠들었습니다 누더기의 남쪽 산에 내 짐 같은 꽃들은 지고 안부없는 흰새는 내를 건너 날아갔습니다 만나지 못한 사람의 이름만 아직도 열병처럼 이마를 두근거리고 있습니다 흙 속에 묻힌 옥잠화 씨앗은 제 혼자 따뜻하고 우리가 가장 쓸쓸할 때 부를 이름 하나는 아직 가슴속에 남겨 두었습니다 그대 먼 길 가거던 돌아오지 마세요 그대 못질한 문패와 뜨락의 신발들 다 잘 있습니다 뒷날 부를 노래 한 소절 베개 맡에 묻어두고 우수의 이불을 덮고 오늘밤은 혼자 잠듭니다 (그림 : 박용섭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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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 부부시(詩)/이기철 2013. 12. 22. 00:29
이 세상 가장 비밀한 소리까지 함께 듣는 사람이 부부다 식탁에 둘러앉아 나란히 수저를 들고 밥그릇 뚜껑을 함께 여는 사람 이부자리 속 달걀만한 온기에도 고마워할 줄 알고 저녁놀 속으로 떨어지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하루를 떠나보내는 사람 적금통장을 함께 지니고 지금은 떠나있어도 아이들 소식 궁금해하는 사람 언젠가 다가올 가을 으스름같은 노년과 죽음에 대해서도 함께 예비하는 사람 이 나무와 저 나무의 잎이 닿을 듯 닿지 않을 때 살닿음의 온기 속에 서로의 등을 뒤이며 머리카락 스쳐간 별빛을 함께 기억하는 사람 이 나무와 저 나무처럼 가장 가까이 서서 먼 우레를 함께 듣는 사람 (그림 : 안호범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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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 외롭다고 말할 수 있는 힘시(詩)/이기철 2013. 12. 22. 00:28
누구도 함부로 외롭다고 말해선 안 된다외로움을 사랑해 본 사람만이 외롭다고 말해야 한다 외로움을 저만치 보내놓고 혼자 앉아 외로움의 얼굴을 그려본 사람만이 외롭다고 말해야 한다 외로움만큼 사치스러운 것은 없다 그의 손으로 무지개를 잡듯이 외로움을 손으로 잡을 수 있어야 외롭다고 말할 수 있다 외로움의 가슴 속에 들어가 바알간 불씨가 되어보지 않는 사람은 외롭다고 말해선 안 된다 외롭다고 말할 수 있는 힘이 있을 때 그 때, 한 방울 이슬처럼 외롭다고 말해야 한다 (그림 : 서인천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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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 초승달시(詩)/이기철 2013. 12. 10. 13:38
초승달을 바라보면서도 글썽이지 않는 사람은 인생을 모르는 사람이다 초승달의 여린 눈썹을 제 눈썹에 갖다 대보지 않은 사람은 슬픔을 모르는 사람이다 새 날아간 저녁 하늘에 언뜻 쉼표 몇 개가 떠 있다 아마도 누구에겐가로 가서 그의 가슴을 비수로 찌르고야 말 초승달 초승달을 바라보면서도 마음 죄지 않는 사람은 인생을 수놓아보지 않은 사람이다 건드리면 깨진 종소리가 날 것 같은 초승달 초승달을 바라보면서도 눈시울 뜨거워지지 않는 사람은 기다림으로 하루를 수놓아 보지 않은 사람이다 (그림 : 장용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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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 어떻게 피면 들국처럼 고요할 수 있을까시(詩)/이기철 2013. 12. 9. 18:32
혼자 있는 날은 적막의 페이지를 센다 페이지마다 햇볕에 말린 참깨 알 소리가 난다 여기 수천 번 다녀간 가을이 갈대 화환을 들고 또 고요의 가슴을 딛고 와 커튼을 젖힐 때 새 떼는 우짖고 들국은 까닭 모르고 희어진다 심근경색의 바람이 혼자 불고 냇물은 살을 여미며 흘러간다 조금쯤은 괴로울 줄도 알아야 살아 있는 것이다 끼니마다 내는 수저 소리가 모두 음악일 순 없지 않느냐 고독이여 내 한껏 사랑하고도 남은 사랑이여 흙의 냄새를 깊이 마신 저 꽃은 필수록 고요하다 오래 살았으면 화려한 병력 하나라도 지녀야 한다고 들국 앉은 옆자리에 들국만 한 집 한 채 지어 보는 오늘 길에 살을 다 내어 준 돌맹이가 햇볕에 심줄을 드러내고 있다 하루가 야위고 야위어서 가시가 된 나뭇가지여 묻노니, 어떻게 피면 들국만큼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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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 추억은 혼자 분주하다시(詩)/이기철 2013. 12. 9. 18:26
저녁이 되면 먼 들이 가까워진다 놀이 만지다 두고 간 산과 나무들을 내가 대신 만지면 추억이 종잇장 찢는 소리를 내며 달려온다 겹겹 기운 마음들을 어둠 속에 내려놓고 풀잎으로 얽은 초옥에 혼자 잠들면 발끝에 스미는 저녁의 체온이 따뜻하다 오랫동안 나는 보이는 것만 사랑했다 이제는 보이지 않는 것도 사랑해야 하리 내 등 뒤로 사라진 어제, 나 몰래 피었다 진 들꽃 한 번도 이름 불러보지 못한 사랑의 이름 눈 속에 묻힌 씀바귀 겨울 들판에 남아 있는 철새들의 영혼 오래 만지다 둔 낫지 않은 병, 추억은 어제로의 망명이다 생을 벗어버린 벌레들이 고치 속으로 들어간다 너무 가벼워서 가지조차 흔들리지 않는 집 그렇게 생각하니 내 생이 아려온다 짓밟혀서도 다시 움을 밀어 올리는 풀잎 침묵의 들판 끝에서 추억은 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