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권대웅
-
권대웅 - 마음의 도둑시(詩)/권대웅 2019. 6. 22. 13:47
마음에 도둑이 들었나 봐 온몸 구석구석을 뒤지더니 깊이 잠들었던 살결을 일깨우더니 종일토록 나가지를 앉는다 도둑이 들어도 정말 큰 도둑이 들었나 봐 두근두근 온몸이 두근거리는 소리에 잠들지 못하고 한밤중 어둠이 헝클어지도록 잠들지 못하고 마음은 하루 종일 서성대는데 창 밖에 가문비나무 뒤척이는 소리 바람이 발자국을 지우는 소리 문을 닫다가 별들에게 그만 내 눈동자를 들켜 버렸는데 가져가려면 빨리 가져가지 이토록 들쑤셔만 놓고 뒤흔들어만 놓고 가지 않는 이여 내 심장을 꺼내 드릴까 한 점 열에 들뜬 살점을 떼어 드릴까 내 머리카락 모두 잘라 신발을 만들어 드릴까 길도 보이지 않고 집도 보이지 않고 구름이 달빛을 삼킨 밤 개들도 깊은 잠에 빠져 버린 밤 아, 너무도 큰 당신이 내 몸 속에 들어왔네 (그림 :..
-
권대웅 - 2월의 방시(詩)/권대웅 2018. 2. 3. 16:58
비틀거리며 내려오는 한줌 햇빛이 박하사탕 같다 환해서 시린 기억들 목젖에 낮달처럼 걸려 봄바람마저 삼켜지지 않을 때가 있다 고요속에 있던 그늘의 깊은 우물로 돌멩이 하나가 떨어지는 소리 나뭇가지에 쌓인 눈의 무게를 못 이겨 쩡! 하고 부러지는 소나무의 이명이 온 산을 메아리로 돌다가 내 몸을 지나갈 때 나는 들었다 생이 버티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낮에 뜬 반달이 겨울 들판에 있는 작은 오두막집 같다 구름이 살고 있는 집 정처 없이 가난했던 사랑은 따뜻한 날이 와도 늘 시리고 춥다 세상에 봄은 얼마나 왔다 갔을까 바람 속에서 엿장수 가위질 같은 소리가 들린다 째깍째깍 오전 열한 시의 적막한 머리카락이 혼자 겨울을 난 방에 꿈틀거린다 (그림 : 노명희 화백)
-
권대웅 - 기억의 갈피로 햇빛이 지나갈 때시(詩)/권대웅 2017. 8. 27. 09:34
햇빛이 각도를 바꿀 때마다 늑골이 아팠다 온몸 구석구석 감추어져 있던 추억 같은 것들이 슬픔 같은 것들이 눈이 부셨나보다 부끄러웠나보다 접혀 있던 세월의 갈피, 갈피들이 어느 날 불쑥 펼쳐져 마치 버려두고 왔던 아이가 커서 찾아온 것처럼 와락 달려들 때가 있다 문득 돌쩌귀를 들추었을 때 거기 살아 꿈틀거리는 벌레처럼 지나간 모든 것들은 멈춘 것이 아니라 남겨진 그 자리에서 다른 모습으로 성장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물지 않고 살아 있는 생채기로 시린 바람이 지나가듯이 자꾸 옆구리가 걸렸다 기억의 갈피갈피 햇빛이 지나갈 때 남겨진 삶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올 때 (그림 : 최석운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