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지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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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엽 - 적벽을 찾아서시(詩)/이지엽 2019. 8. 25. 10:49
마음에는 누구에게나 하늘이 있습니다 푸른 물 고여 출렁이는 산, 그 흰 이마의 새 떼 흘러도 다 울어내지 못한 강물이 있습니다 때로 절정을 향해 별은 또 빛나고 번개와 우레가 외로움에 꽃히지만 누구도 스스로의 하늘 도달할 수 없습니다 마음에는 누구에게나 바다가 있습니다 희끗희끗한 절망의 파도, 등 푸른 욕망들 숯처럼 타오르는 한 척 배 목숨처럼 떠 있습니다 숨비 소리 하나도 숨어 그대를 향하지만 부딪히고 깨어져도 잠 하나 못 이룬 섬, 누구도 스스로의 바다 가 닿을 수 없습니다 (그림 : 김윤종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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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엽 - 어느 종착역에 대한 생각시(詩)/이지엽 2019. 8. 25. 10:47
기차를 타는 순간 우리는 종착역을 생각한다 들판을 지나 강을 건너고 산과 집들을 지나 우리는 반드시 종착역에 도착할 것이다 그리고 사람을 만나고 밥을 먹고 얘기를 나누리라 웃고 떠드는 순간 신기하게 역은 지워지고 우리는 알아채지 못한 채 역에서 멀리 떨어져 나간다 지워지는 무늬, 물속으로 가라앉는 발길들 사랑은 늘 그런 것이다 그러니 역은 잠시 있다 사라지는 것 물길이거나 떨어지는 꽃잎 같은 것 우리는 이미 수건으로 손을 씻었거나 밟고 지나왔다 종착역은 아마 처음 역이었을지도 모를 일 십 수 년 동안 상환해오던 전세금 융자를 다 갚거나 원수처럼 지내던 사람과 어려운 화해를 하고 눈물을 흘렸을 때 방금까지 역은 분명히 있었는데 감쪽같이 사라진다 (이 감쪽같음을 평화라 명명할 수 있을까?) 하나를 이룩해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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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엽 - 널배시(詩)/이지엽 2016. 1. 12. 12:26
남들은 나무라는데 내겐 이게 밥그륵이여 다섯 남매 갈치고 어엿하게 제금냈으니 참말로 귀한 그륵이제 김 모락 나는 다순 그륵! 너른 바다 날 부르면 쏜살같이 달리구만이 무릎 하나 판에 올려 개펄을 밀다 보면 팔다리 쑤시던 것도 말끔하게 없어져 열일곱에 시작했으니 칠십 년 넘게 탄 거여 징그러워도 인자는 서운해서 그만 못 둬 아 그려, 영감 없어도 이것땜시 외롭잖여 꼬막만큼 졸깃하고 낙지처럼 늘러붙는 맨드란 살결 아닌겨 죽거든 같이 묻어줘 인자는 이게 내 삭신이고 피붙이랑게 (그림 : 조금주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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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엽 - 새벽 두 시시(詩)/이지엽 2015. 11. 4. 09:52
새벽 두 시에 사람이 갑자기 보고 싶다 햇살에 밥 비벼 쌍치쌈하던 은근 쓸쩍 영철이와 뭔가 또 뚱한 일판 벌여 눈 부라리고 있을 울산의 일근이 보고 싶다. 설사는 멎었나 바다 건너 동찬이 사람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이거 봐 자네 아니면 아야 잠좀 자라 지발 그러는 목소리가 듣고 싶다 그렇게 부르던 친구는 멀리에 있고 그렇게 잔투정부리던 어머니도 너무 멀리에 있다 산은 어두워질수록 하늘과 숲을 그러안고 세상의 모든 경계를 지우며 살과 살로 만나는데 멀어지는 것은 사람만의 일, 몸은 거기 어디쯤 내려 낙엽을 태우며 소주 한 잔, 바람의 눈썹 밑에 날리는 쓸쓸함 한 줌이거나 낡은 빗자루에 쓸리는 먼지 만한 그리움이더라도 시랑고랑 머물고자 하나 마음은 벌써 청동 종소리, 그 흰 눈밭을 건너간다 (그림 : 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