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지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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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엽 - 그리움시(詩)/이지엽 2014. 4. 8. 14:02
어쩌나 바람잔 날은 티눈 떨어질까 애끈하더니 어느 사이 이팝나무는 돌담 빼곡이 고개 디밀었지요 예닐곱 살 꼬마애들이 소꿉장난하다가 싫증이 났는지 남자애들은 업어치기하는 놈, 자물시는 놈, 안다리 후려치는 놈, 나 잡아봐라 하늘 귀밑까지 아슬히 기어오르는 놈, 미끄럼 타는 놈, 나동그라지는 놈 여자애들은 그걸 올려보고 흰 치아 보일락말락 속곳 보일락말락 까르르 까르륵거렸는데요, 서른 여덟 노총각 준석이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눈 꺼묵이며 애먼 마당 구석구석을 팍팍, 팍팍 쓸어내고 있었는데요 빗자루 지나간 자리가 가는 줄무늬를 연신 따라가며 아파 아파라, 하고 있었지요 아마 (그림 : 김승완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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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엽 - 비가(悲歌)시(詩)/이지엽 2014. 4. 8. 13:59
흐리고 안개낀날 나 그대를 보내야겠네 말간 시간의 뼈들이 떠가는 새벽 정거장 물방울 두어점 떨어질 듯 아린 고비 다 지나 넘고 넘어온 능선 어질머리 꿈 다 버리고 산과 하늘 맞닿은 곳 그 아슬한 추억도 지나 꺼지는 등불 바라보며 그대 보내야겠네 어떤 것이 우리에게 남아 악수를 청해와도 담담히 건네는 눈짓 서로에게 보이지 않더라도 떠남을 예비한 만남 눈물 아예 흘리지 않으리 돌아오는 강둑길 저 푸릇한 잎새며 들풀 밟고 지나온 유년기의 향내 가지런히 모아 더러는 그대에게 보내고 더러 나 안고 오겠네 (그림 : 안명석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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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엽 - 아무도 나를 위해 울어주지 않는다시(詩)/이지엽 2014. 4. 8. 13:54
그 아무도 그 누구도 나를 위해 울어주지 않는다. 세상이 나 혼자만을 택한 것이 아니므로. 누가 저 어둠 속에서 오는가 그를 위해 나는 울지 않는다. 천일(千日)같은 하루가 가고 창밖으로 손을 흔들지만 사람들은 흘러가고 흘러오고 물건값을 흥정하고 으레 거래 뒤는 허전하다. 광장은 비어 있다. 새벽 종소리도 남을 위해 울지 않는다. 자신의 침묵에 금을 그으며 울 뿐, 희망과 꿈을 갖지 말자. 내일(來日)은 내일은...... 이라고 말하지 말자 우리는 예수를 다시 죽게 할 것이므로. 중요한 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것이고 아무도 나를 위해 울어주지 않는 것이고 오늘 내가 여기 있는 것이고 그래서 희망이라 생각하는 것을 이렇게 눈물겹도록 껴안고 있는 것이다. (그림 : 윤위동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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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엽 - 물 위의 길시(詩)/이지엽 2014. 4. 8. 13:51
산과 산이 서로 허리 잇대어 깊고 험한 산일지라도 길과 만난다 말하자면 산 사이로 난 길은 모든 산의 두통과 비밀한 고뇌가 잠시 그친 곳 길은 가시덤불과 적자생존과 영역 확장의 반연을 멈추게 하여 편안하게, 산을 쉬게 하고 싶었던 거다 산수유꽃 지는 산동마을 병아리떼 오종종한 그 환한 산길을 눈빛 줄 데 없이 걸어가는 사람의 뒷모습은 오래된 길의 그늘처럼 아름답다 길이 길에 연하여 끊기지 않은 길이라 할지라도 강과 만나다 말하자면 들과 도시를 가로지르는 강은 온갖 길의 보통과 꽃지는 설움이 잠시 그친 곳 강은 아픈 바퀴와 양은냄비의 삶과 질주의 광기를 멈추게 하여 그윽하게, 길을 잠기게 하고 싶었던 거다 은모래 부서지는 하동포구 모래 한줌 던지면 뛰어오르는 꺽지와 누치 그들과 은빛 얘기를 나누며 가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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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엽 - 적소(謫所)에 들다시(詩)/이지엽 2014. 4. 8. 13:48
푸르게 금 긋는 대밭 머리를 지나면 명치 끝에 걸리는 불혹 겨울의 입구에 선 사랑이 보인다 눈이 내리는 남도는 이제 하나의 거대한 섬, 영산벌 가득히 물보라 날린다 부서져 흩어지는 저 욕망의 흰 파편들 온 산의 거친 숨소리가 뒤척이며 돌아눕는다 보았던가 그때, 절명의 한 순간을 위하여 한 세기의 노을을 바스라지도록 끌어안고 느낌표처럼 쓸쓸하게 추락하던 한 사내 죽어서도 제 육신에 새순을 밀어 올리는 고목 등걸, 위에도 연하여 며칠 눈이 또 내리고 이윽고는 네 처녀림(處女林)에 돛을 내리리라, 편지를 쓰는 저녁 나는 은백색의 곰 한마리가 되는 꿈을 꾸곤 했다 보이는 모든 세계가 눈보라 속 아득한 경계로 사라져 더러 미명의 열꽃으로 깊이 앓으리라 유년의 대장간 소리가 그리운 겨울 한낮 걷다가 웃다가 언뜻언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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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엽 - 격포 가는 길시(詩)/이지엽 2014. 4. 8. 13:45
노을진 바다를 끼고 달려본 사람은 안다 에돌아간 굽이에서 바다는 왜 매혹스런 죽음의 눈길로 우리를 유혹하는지 이루지 못한 사랑의 빛깔이 왜 자지색 울음빛이어야 하는지를 그 울음빛 받아 성에꽃, 그래 성에꽃 핀다 흔종의 틈새에 방울방울 맺히는 이슬, 한 사람을 떠나보내는 일은 결코 녹록한 일이 아니리라 세상에는 눈에 박아둘 사소한 날의 기억도 많은데 지친 한때 그늘을 만들어주던 나무를 스스로 뽑아내고 한 알 검은 씨앗 땅에 묻는 일, 그냥 외면한 채 서 있을 걸 그랬다 햇살 환한 유리창 가 하얀 성에꽃, 때가 이르르면 유리창 밖 산과 지붕의 경계가 선명해지는 것인데 그 꽃밭의 꽃들 무엇인지 분명치 않는, 그러나 환한 꽃들의 이름, 훈김 내지 말고 시린 손 호호 불며 서 있을걸 그랬다 그래도 마음과는 상관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