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향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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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아 - 왜 이렇게 얼었어시(詩)/이향아 2018. 10. 16. 02:08
왜 이렇게 손이 얼었어, 그가 물었을 때 대답 대신 눈물이 쏟아졌다 얼마만인가, 이 따뜻하고 간간한 액체 왜 얼었을까? 나는 왜 얼어서 늦가을 억새처럼 서걱거릴까 깨어진 사금파리처럼 혼자 뒹굴까 시끄러운 세상, 궂은 날씨 촉새 참새 알을 까는 잔 근심 때문인가 얼어 있는 것은 손만이 아니다 사는 일 갈수록 주눅이 들어 터진 입 열린 귀도 봉해 버리고 통째로 돌아앉아 짓눌리는 일 돌아앉아 벼랑 깊이 빠져드는 일 그래도 가끔가끔 물어주면 좋겠다 왜 이렇게 손이 얼었어 대답 대신 한바탕 짭짤하게 울고 싶다 이 핑계 저 핑계로 오래오래 울고 싶다 (그림 : 권대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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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아 - 회상하는 나무시(詩)/이향아 2018. 9. 2. 00:25
겨울나무 마른 가지는 죽지 않았다 죽음보다 무겁게 눈을 감고 있을 뿐 짧은 봄 질컥이는 밭두렁 길과 가을 강 가라앉은 긴 이야기를 회상에 젖어 있기 아픈 나무는 열 손가락 펴서 그물을 치고 만국기 정신없이 흔들어대던 지난여름보다 숙성해 있다 돌아다보는 얼굴은 달빛마다 추연하다 더 붉은 꽃, 더 실한 열매를 그리면서 돌아다보는 눈물은 그렇다, 아름답다 세상에는 횃불을 밝혀도 보이지 않는 것이 두 눈을 뜨고도 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금 같은 침묵은 시작되었다 실가지에서 뿌리로 수백 리 물길을 트고 천지에 흩어진 핏줄을 모아 새 목숨을 연습하는 겨울나무 안개 같은 숨을 속으로 내쉬면서 잃어버린 길을 찾아가고 있다. (그림 : 조선아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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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아 - 콩나물을 다듬으며시(詩)/이향아 2017. 7. 6. 23:18
콩나물을 다듬으며 나는 나란히 사는 법을 배운다 줄이고 좁혀서 같이 사는 법 물 마시고 고개 숙여 맑게 사는 법 콩나물을 다듬으며 나는 어우러지는 적막감을 안다 함께 살기는 쉬워도 함께 죽기는 어려워 우리들의 그림자는 따로 따로 서 있음을 콩나물을 다듬으며 나는 내가 지니고 있는 쓸데없는 것들 나는 가져서 부자유함을 깨달았다 콩깍지 벗듯 던져버리고픈 물껍데기뿐 내 사방에는 물껍데기뿐이다 콩나물을 다듬으며 나는 비로소 죽지를 펴고 멀어져가는 그리운 나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림 : 고찬규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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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아 - 군불을 때며시(詩)/이향아 2017. 3. 19. 01:44
삼태기 그득 식은 재를 퍼내고 아궁이 앞에 낮게 앉으니 그립다 성냥불 그어서 군불 지펴본 지 오래다 역풍에 밀리는 연푸른 연기 참나무 장작이 덜 말라서 매캐한 그 연기에 울어본 지 오래다 송진내 방고래가 터지게 두고 구들에 등 붙이고 달을 내다볼 꺼나 불에 되쐰 흰 달이 상기한 얼굴로 아리한 어지럼증 휘말려 들지라도 풀무질에 맵겨 타는 소리 들어본지 오래다 오래된 것은 하나씩 잊혀지고 새로 나온 것들은 낯이 설어 너풀너풀 끄름이 기어 나오는 아궁이 앞에 퍼버리고 앉아 공연한 일로 시간을 죽여본 지 오래다 (그림 : 이범오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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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아 - 나무는 숲이 되고 싶다시(詩)/이향아 2016. 6. 20. 20:21
나무는 나무로, 다른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 초록에서 헝클어진 머리칼을 다듬고 키가 클수록 휘청거리는 다리 살아가는 일은 휘청거리는 일이라고 타고난 뿌리만큼 어깨를 추스르고 타고난 기운만큼 얽어서 견딥니다 나무는 다만 숲이 되고 싶습니다 바위나 언덕이나 벼랑이거나 지금 어디로 다리를 뻗을 것인지 담쟁이와 칡넝쿨이 잡아당겨도 함께 살다가 함께 죽자 누구를 내쫓거나 돌려세우지 않습니다 나무는 다만 숲이 되고 싶은 꿈 그 꿈 하나만은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림 : 강윤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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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아 - 물새에게시(詩)/이향아 2014. 9. 6. 18:35
갈매의 바다 멀고도 깊은 눈 사랑을 지키던 천신들도 죽으면, 나도 죽으면 그리로 가서 소금바다 눈물 몇 방울 그 바다에 섞으리. 물새야, 물새야 너는 좋겠다. 내 평생 멍든 속병 눈빛을 겨냥하는 일 나를 보는 은총 앞에 마주 서는 일. 눈부셔, 눈부셔라. 수평선 골목길로 스며드는 일. 물새야, 제 신명에 춤이라도 추는 것아 나를 데려다가 파도 위에 띄워다오. 그 사람이 돌아오는 날갯소리 바람소리 기다림의 귀밝은 그물은 그만 걷고 허허로운 바다 그 과녁에 취하여 아득한 검불 하나, 검불같이 가벼운 물새나 되어 뜨게, 흐느적거리게 나도, 끼룩거리게. (그림 : 김상용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