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박종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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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영 - 느린 동네시(詩)/박종영 2020. 9. 26. 16:59
서걱서걱 갈잎 사이 잘 익은 해 한 덩이 검붉은 목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이삭 거둬간 너른 들판 참새 떼 수면을 차고 올라 떼 지어 난다 햇살 무거워 넘어지는 서쪽 철새들 무리 지어 날고 익숙한 풍경만 지워 나가는 촌로 벼 이삭 끝없이 펼쳐진 땅 한 뼘 안에 갇혀있다 방조제로 갈라진 수면 위로 물안개 우물거리고 사투리 길게 늘어지는 동네 성긴 결 더듬어 찾아온 이곳 게국지 참맛에 하루해가 저문다 게국지 : 충남 서산 지역에서 절인 배추와 무, 무청 등에 게장 국물이나 젓갈 국물을 넣어 만든 음식. (그림 : 김정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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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영 - 이별은 참 서운한 것이데시(詩)/박종영 2014. 6. 9. 19:22
날 잡아 떠난 것도 아니고 어느 날 이별의 시간앞에 놓고 보내기 싫어 가슴 짚어보니 층층이 서리낀 날이 눈가에 맺히데 아직 생생한 물기둥으로 솟는 눈물비 마음안에 남아있는 것 같아 잡은 손 놓아주고 곰곰이 돌아선 뒤안 마른잎이 굴러가고 있어 내 울음 함께하기 부끄러웠네 누구나 살다가 한번쯤 헤어지는 길 새봄이 와 꽃이 피 듯 저절로 이별도 만남으로 피어나면 오죽이나 좋을까? 사람끼리 정주고 받는 것 내 한 몸 묶어 떠나 보내면 되는 요술같은 생각이 가슴에 빙빙도는 것은 또 얼마나 엉뚱한 그리움인가 그대 가는 날은 빗살처럼 눈 내리는 날이었네 동구 밖 그늘에 숨어 건네지 못한 목소리 들리게 슬픈 마음 얹혀 배웅하고 있었네. (그림 : 장용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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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영 - 어머니의 장독대시(詩)/박종영 2014. 5. 18. 22:32
봄 물결 타는 초록빛, 조금은 도도하게 흔들리고 시간의 매듭이 쌓여 풍경이 되는 뒤란 대숲, 은밀하게 산비둘기 불러들여 수작을 건다 비끼는 대나무 사이 떡가루처럼 떠 있는 안갯속으로 어스름은 도둑처럼 찾아들고 강변 매화 외롭게 피어 시린 봄을 달래는 밤이면, 흙담 기댄 어머니의 장독대 그곳엔 언제나 그랬듯이 누구의 세월도 아닌 정화수 한 사발 새벽달로 차오르고, 별들은 그렁그렁한 눈물을 가득 채운다 묵주 같은 어둠의 깊이에 서성이는 정갈한 신의 영험을 한곳으로 불러 모으면서 아무에게도 들려주지 못하고 두손 빌어 비운의 가족사를 외우는 어머니, 그토록 맨발같은 차가운 목소리는 이어지고 한 줄기 빛의 기운으로 뽀얀 달무리 피어난 그곳, 새벽으로 돌아 빙긋이 기쁨안고 승천하는 혼백이 흰밥 한 숱 깔, 맑은 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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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영 - 봄이 강을 건너다시(詩)/박종영 2014. 5. 18. 22:30
산수유 노란 웃음으로 풀리는 고향의 봄, 샛강은 허리춤 곧추세워 징검다리 건너뛰고 아프게 흐르는 흙빛 물살, 자운영 꽃길 따라 산은 강을 건너고 강은 그림자 드리운 채 물가에 서 있다. 겹도는 구부나루 흐느끼는 안개, 그 안갯속으로 아득한 강줄기 흐르고 흘러 구진포 휘돌아 치니 회진이라 했던가, 지난겨울 칼끝 바람 언강을 가르더니 보송보송 버들강아지 찬 기운 몰아내느라 붕붕거린다. 해동기(解凍期) 맛 들여 풋대 세우는 청보리 물결, 긴 사래 끝자락 흩어진 풍경을 주어 모으고, 얇게 봄을 벗기는 유채꽃 웃음소리 오래된 그리움 데리고 와 꽃씨방 어르고, 몽탄나루 거슬러 오르는 버들치 물장구치는 소리 살아 있으므로 융숭한 영산강(榮山江)의 맥박소리 이때쯤, 날씬한 봄이 강을 건너온다는 소식, 먹이 찾아 촐싹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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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영 - 별무늬 산도라지 꽃의 여백시(詩)/박종영 2014. 5. 18. 22:20
꽃잎이 하늘 옷을 입었다. 줄기마다 다섯 개의 각을 이루고 핀 꽃 파스름한 웃음이 마음에 수를 놓는다. 함께 달리자는 유혹을 마다하고 아득히 바라만 보다가 떠나간 사랑처럼 피어나 울고 있는 눈물 꽃이다. 너를 매만지며 그대 찾아 산을 오르던 날, 황톳빛 낮은 산아래 소슬바람 꿈 키우는 들녘이 배를 불리고. 나지막이 부르는 산새 소리 귀담아들으매 고운 밤 비워놓을 그대 목소리, 네 눈빛 닮은 파란 가슴으로 설렌다. 오르는 길마다 봉봉한 꽃 입술 모진 바람에 부대꼈어도 혼자 남아 퍼 올리는 푸른 웃음, 하늘색 닮아가는 청초함으로 그리움 떠받치고 핀 별무늬 푸른 산도라지, 빛의 속도로 사라지는 너를 사랑한다. (그림 : 이남순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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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영 - 푸른 오월에시(詩)/박종영 2014. 5. 4. 11:41
고향 언덕배기 척박한 땅 자리하고 피는 들 찔레 그 하얀 가슴에 첫사랑이 보이는 오월입니다 청보리가 낮달을 품어 배를 불리고 청명한 바람이 강산에 고루 퍼지면 꽃 진액 달고 끈끈하게 피는 늦깎이 철쭉 입하 지나 해는 길어지고 먼 산 뻐꾸기 울음이 애잔한 마음에 물결을 씌우는 한나절 어느 누구에게도 다가가지 못하는 외로운 시간 잔인한 사월의 아픔을 밀어내고 풋풋한 웃음을 피워내는 오월, 그 풋풋한 웃음을 섞어 차지게 먹이고 먹어야 하는 환희의 오월입니다. (그림 : 김동구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