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하종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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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오 - 조금 늦게시(詩)/하종오 2023. 2. 23. 06:56
올해엔 지난해보다 조금 늦게 매화꽃이 피었다 이런 관찰은 나의 시간과 매화꽃의 시간이 똑같이 흘러간다는 상식에서 비롯되었지만 매화꽃은 나의 시간과는 다른 누구의 시간에 제 시간을 맞추었을까 무엇의 시간에 제 시간을 맞추었을까 올해엔 지난해보다 조금 늦게 핀 매화꽃을 보면서 매화꽃의 시간에 맞춘 누구의 시간이 나의 시간에 맞추지 않았는지 무엇의 시간이 나의 시간에 맞추지 않았는지 여러모로 생각한다 나는 나의 시간을 누구의 시간에 맞춰야 할까 나는 나의 시간을 무엇의 시간에 맞춰야 할까 나는 나의 시간을 매화꽃의 시간에 맞춰야겠다 그러면 나의 시간은 누구의 시간에도 맞고 무엇의 시간에도 맞아서 모두가 조금 늦게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림 : 오견규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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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오 - 아버지 생각시(詩)/하종오 2020. 12. 24. 11:49
저를 낳은 고향에서 늙으시는 아버지 저도 타향에서 자식 거느린 아비가 되었습니다. 어린 것 품에 안고 봄 햇살 속에 서면 자식 가슴에 맞대어야 제 가슴이 맑아지고 자식 속에 스며들어야 제 속이 깨끗해지니 어디서나 사람들이 넉넉하게 보이고 아버지 늙으신 뜻도 알겠습니다. 늙으셨건만 제게 늘 어린 마음이셨던 아버지 저는 커다란 산을 뛰어넘으면서도 시든 풀꽃 앞에서는 울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고향 쪽 하늘 더듬으며 제가 늙어갈 적엔 제 자식은 다른 타향에서 아비 되어 이리 생각하리라 믿습니다.아버지 (그림 : 설종보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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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오 - 혀의 가족사시(詩)/하종오 2019. 10. 3. 13:07
어린 그가 눈에 티끌이 들어가 쓰라려했을 적에 어머니는 혀끝으로 핥아 빼주었다 그날부터 눈알이 밝아져 그는 어머니가 하려던 일을 먼저 볼 수 있었다 어린 그가 벌레에게 물려 몸을 긁적였을 적에 어머니는 혀끝으로 침을 발라주었다 그날부터 한동안 온몸이 가벼워져 그는 어머니가 하려던 일을 대신할 수 있었다 어린 그가 어른이 되어 낳았던 어린 자식들이 어른이 되던 날까지 어머니한테 배운 대로 그는 혀끝으로 티끌 들어간 눈을 핥아 빼주었고 벌레 물린 몸에 침을 발라주었다 그러나 티끌과 벌레 더욱 들끓는 빈부의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자식들은 그가 하려는 일을 먼저 보지도 않고 대신하지도 않고 혀를 빼물거나 혀를 끌끌 찼다 (그림 : 김경렬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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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오 - 열매 도둑 단풍 도둑시(詩)/하종오 2019. 10. 3. 13:04
며칠만에 돌아와 집안 둘러보니 풀들이 밟혀 작은 길 생겨나 있다 그 새로 난 작은 길 가보니 은행나무 아래서부터 감나무 아래로 가서 멎었다가 대추나무 아래로 가서 멎었다가 뒤란 둔덕까지 가서 멎어 있고 나무마다 가지에 열매 하나 없다 우리 집에는 대문이 없는데도 올해도 누가 집 뒤에 트럭 대놓고 들어와 대추와 감과 은행 싹 털어 싣고 갔다 단풍 들 무렵이면 내가 집 나가는 짓거리 알고 있는 이웃이 와서 한 짓거리 아니라면 해마다 때 잘 맞출 순 없는 법이지만 혐의를 품지 않기로 한다 나도 산천에는 대문에 없다는 걸 알고 함부로 이곳저곳 드나들며 나무들이 잎에 맺은 색깔들 눈독들여 와서 마음에 한 자리 깔았으니 피장파장 아닌가 그 새로 난 작은 길 발자국 맞춰 걸어보니 내 걸음나비와 똑같다 (그림 : 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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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오 - 맛국물을 만드는 동안시(詩)/하종오 2019. 10. 3. 12:59
눈이 내려쌓인 점심때 아들이 국수를 먹고 싶다 해서 아내가 냄비에 물을 담고 멸치와 다시마를 집어넣은 뒤 가스레인지에 얹고 딸깍, 불을 붙였다 나도 갑자기 군침이 돌아서 덩달아 국수를 먹고 싶다고 말했다 물이 끓기 시작하자 아내가 불을 낮추었다 식탁에 마주앉아 있던 아들이 노트북을 가져와서 켜곤 양손으로 키보드를 두드리고 나는 거실 창문으로 고개를 돌려 흰 눈이 덮인 논밭을 내다보았다 아직도 입맛이 사라지지 않는 건 자식에게 해줄 일이 남아선가 젓가락질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은 부자간에 진작 끝났지 않는가 내 주제를 파악하자, 하고 나는 생각했다 비등점에 다다른 물이 멸치와 다시마를 우려내는 냄새가 집 안에 스르르 퍼질 때 아내가 젓가락 세 벌을 딱, 딱, 딱, 식탁에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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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오 - 하늘눈시(詩)/하종오 2018. 5. 2. 12:06
내 텃밭을 얕봐서 앞집 트랙터나 뒷집 경운기론 반나절도 안 걸린다며 갈아주지 않는다 삯도 몇 푼밖에 받지 못하여 영 재미없겠지만 내게는 아침나절 저녁나절 나흘 일거리다 풀꽃들이 웃자라 벌써 꽃 피우고 서 있는 흙을 나는 한 삽 한 삽 떠서 제자리에 엎는다 그그저께는 한 두둑 일궈서 아욱, 그저께는 한 두둑 일궈서 시금치, 어제는 한 두둑 일궈서 열무 상추, 오늘은 한 두둑 일궈서 고추 모종, 국거리 찬거리 다 준비하고 나니 내 텃밭도 넓다 사지삭신에 흙을 부리고 나면 하늘눈이 생겨나는가 저기 산에서 여기 나무에게로 슬며시 오는 그늘이 보인다 가지에 둥지 친 새를 따라 날아다니는 나무가 보인다 언젠가 남을 비웃던 날이 내가 땅을 치고 울 날로 보인다 수년 전에 수직으로 보이던 내가 오늘은 수평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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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오 - 남누리 북누리 아름다운 남북누리시(詩)/하종오 2018. 5. 2. 12:03
봄이 남누리에서 북누리로 올라가면서도 초록빛 붐으며 올라가 묏구비마다 무더기로 풀꽃을 피우며 햇볕과 물을 풀어놓지만 이 땅에 내릴 커다란 녹음을 그리며 우리들은 뜨거운 여름을 산다. 가을이 북누리에서 남누리로 내려오면서도 단풍잎을 뿜으며 내려와 골굽이마다 일시에 잎새를 떨어뜨리며 그늘과 바람을 깔아놓지만 이 땅에 솟을 수 많은 아지랭이를 기다리며 우리들은 차가운 겨울을 산다. 이렇게 한반도에는 사시사철이 이어져 몇 백 몇천 년이 끊어지지 않는 하루하루이니 그 나날에 비록 온 천지를 가지진 못해도 우리들 태어나면서 형제로 태어난 우리들 이 나라에서 남누리 북누리 아름다운 남북누리가 한누리 될 때까지 살밖에 없다. 그러나 아직 청산에 사월에 죽은 넋이 묻히지 않았고 오월에 죽은 넋은 사람마다 떠돌아 일년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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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오 - 누가 살고 있기에시(詩)/하종오 2017. 6. 30. 19:05
새가 와서 잠시 무게를 부려보기도 하고 바람이 와서 오래 힘주어 흔들어보기도 한다 나무는 무슨 생각을 붙잡고 있는지 놓치는지 높은 가지 끝 잎사귀들 떨어뜨리지 못하고 있다 잎이 다 시드는 동안 나무는 가슴을 수없이 잃고 찾고 했나보다 그의 둘레가 식었다가 따스해졌다가 반복하는데 내가 왜 이리도 떨릴까 아직 가까이하지 않은 누군가의 체온 같기도 하고 곁으로 빨리 오지 못하는 누군가의 체온 같기도 한 온기가 나를 감싼다 그의 속에는 누가 살고 있기에 외롭고 쓸쓸하고 한없이 높은 가지 끝에 잎사귀들 얼른 떨어뜨리지 못하도록 그의 생각을 끊어놓고 이어놓고 하는 걸까 나무가 숨가쁜 한 가슴을 꼬옥 꼭 품는지, 나도 덩달아 가슴이 달떠지는 것이어서 내 몸속에도 누가 살고 있기는 있는 것이다 가만히 서서 나무를 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