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백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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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 구장로(球場路)시(詩)/백석 2020. 9. 27. 15:49
- 서행시초(西行詩抄) 1 삼리(三里) 밖 강(江)쟁변엔 자개들에서 비멀이한 옷을 부숭부숭 말려 입고 오는 길인데 산(山)모퉁고지 하나 도는 동안에 옷은 또 함북 젖었다 한 이십리(二十里) 가면 거리라든데 한겻 남아 걸어도 거리는 뵈이지 않는다 나는 어니 외진 산(山)길에서 만난 새악시가 곱기도 하든 것과 어니메 강(江)물 속에 들여다뵈이든 쏘가리가 한자나 되게 크든 것을 생각하며 산(山)비에 젖었다는 말렸다 하며 오는 길이다 이젠 배도 출출히 고팠는데 어서 그 옹기장사가 온다는 거리로 들어가면 무엇보다도 몬저 '주류판매업(酒類販賣業)'이라고 써붙인 집으로 들어가자 그 뜨수한 구들에서 따끈한 삽십오도(三十五度) 소주(燒酒)나 한잔 마시고 그리고 그 시래기국에 소피를 넣고 두부를 두고 끓인 구수한 술국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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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 통영(統營) 1시(詩)/백석 2019. 6. 14. 00:39
옛날엔 통제사(統制使)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港口)의 처녀들에겐 옛날이 가지 않은 천희(千姬)라는 이름이 많다 미역오리 같이 말라서 굴껍질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이 천희(千姬)의 하나를 나는 어느 오랜 객주(客主)집의 생선 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 저문 유월(六月)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방등이 붉으레한 마당에 김냄새 나는 비가 내렸다. 천희(千姬) : 바닷가에서 시집 안 간 여자를 `천희`라고 하였음. 또한 천희(千姬)는 남자를 잡아먹는(죽게 만드는) 여자라는 뜻이다. 미역오리 : 미역줄기 소라방등 : 소라의 껍질로 만들어 방에 켜는 등잔 (그림 : 박연옥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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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 넘언집 범 같은 노큰마니시(詩)/백석 2018. 5. 8. 18:20
황토마루 수무나무에 얼럭쿵 덜럭쿵 색동헝겊 뜯개조박 뵈짜배기 걸리고 오쟁이 끼애리 달리고 소삼은 엄신같은 딥세기도 열린 국수당고개를 몇 번이고 튀튀 춤을 뱉고 넘어가면 골안에 아늑히 묵은 영동이 무겁기도 할 집이 한 채 안기었는데 집에는 언제나 센개같은 게사니가 벅작궁 고아내고 말 같은 개들이 떠들썩 짖어대고 그리고 소거름 내음새 구수한 속에 엇송아지 히물쩍 너들씨는데 집에는 아배에 삼춘에 오마니에 오마니가 있어서 젖먹이를 마을 청능 그늘밑에 삿갓을 씌워 한종일내 뉘어두고 김을 매러 다녔고 아이들이 큰 마누래에 작은 마누래에 제 구실을 할 때면 종아지물본도 모르고 행길에 아이 송장이 거적뙈기에 말려나가면 속으로 얼마나 부러워하였고 그리고 개때에는 부뚜막에 바가지를 아이덜 수대로 주룬히 늘어놓고 밥 한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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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 외갓집시(詩)/백석 2018. 5. 8. 18:04
내가 언제나 무서운 외갓집은 초저녁이면 안팎마당이 그득하니 하이얀 나비수염을 물은 보득지근한 북쪽제비들이 씨굴씨굴 모여서는 쨩쨩쨩쨩 쇳스럽게 울어대고 밤이면 무엇이 기와골에 무리돌을 던지고 뒤우란 배나무 에 째듯하니 줄등을 헤여달고 부뚜막의 큰솥 적은솥을 모조 리 뽑아놓고 재통에 간 사람의 목덜미를 그냥그냥 나려 눌 러선 잿다리 아래로 처박고 그리고 새벽녘이면 고방 시렁에 채국채국 얹어둔 모랭이 목판 시루며 함지가 땅바닥에 넘너른히 널리는 집이다. 보득지근한 : 보다랍고 매끄러운 (평안도 말) * 씨굴씨굴 : 수두룩하게 많이 들끓어 시끄럽고 수선스런 모양. * 쇳스럽게 : 카랑카랑하게. * 무릿돌 : 많은 돌. 길바닥에 널린 잔돌. 뒤우란 : 뒷마당 울타리 안쪽 * 쩨듯하니 : 환하게. * 재통 : 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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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시(詩)/백석 2018. 5. 8. 18:02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잠풍 날씨가 너 무나 좋은 탓이고 가난한 동무가 새 구두를 신고 지나간 탓이고 언제나 꼭같은 넥타이를 매고 고은 사람을 사랑하는 탓이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또 내 많지 못한 월급이 얼마나 고마운 탓이고 이렇게 젊은 나이로 코밑 수염도 길러보는 탓이고 그리고 어느 가난한 집 부엌으로 달재 생선을 진장에 꼿꼿이 지진 것은 맛도 있다는 말이 자꾸 들려오는 탓이다 잠풍 : 잔잔하게 부는 바람 달재 : 달째. 달강어(達江魚) 쑥지과에 속하는 바닷물고기 길이 30Cm 가량으로 가늘고 길며 머리가 모나고 가시가 많음 진장(陳醬) : 진간장 . 오래 묵어서 진하게 된 간장 (그림 : 이의성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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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 개시(詩)/백석 2015. 5. 8. 19:05
접시 귀에 소기름이나 소뿔등잔에 아즈가리 기름을 켜는 마을 에서는 겨울밤 개 짖는 소리가 반가웁다 이 무서운 밤을 아래웃방성 마을 돌아다니는 사람은 있어 개는 짓는다 낮배 어니메 치코에 꿩이라도 걸려서 산(山) 너머 국수집에 국수를 받으러 가는 사람이 있어도 개는 짖는다 김치가재미선 동치미가 유별히 맛나게 익는 밤 아배가 밤참 국수를 받으러 가면 나는 큰마니의 돋보기를 쓰고 앉어 개 짖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아즈까리: 아주까리, 피마자 겨을: 겨울 아래웃방성: 방성(傍聲). 예전에 과거에 합격한 사람을 알리는 방꾼이 방을 전하기 위해 크게 외치던 소리 낮배 : 낮에, 한낮 무렵 어니메: 어디 치코: 키에 얽어맨 새잡이 그물의 촘촘한 코, 올가미 김치가재미: 겨울철에 김치를 묻은 움막 큰마니: 할머니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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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 박각시 오는 저녁시(詩)/백석 2015. 5. 8. 11:50
당콩밥에 가지 냉국의 저녁을 먹고 나서 바가지꽃 하이얀 지붕에 박각시 주락시 붕붕 날아오면 집은 안팎 문을 횅 하니 열젖기고 인간들은 모두 뒷등성으로 올라 멍석자리를 하고 바람을 쐬이는데 풀밭에는 어느새 하이얀 대림질감들이 한불 널리고 돌우래며 팟중이 산 옆이 들썩하니 울어댄다 이리하여 하늘에 별이 잔콩 마당 같고 강낭밭에 이슬이 비 오듯 밤이 된다. 바가지꽃 : 박꽃의 평북 정주 지방의 사투리 박각시 : 나비목(鱗翅目) 박각시과의 곤충. 날개길이 42∼50mm이다. 몸 ·날개 모두 암회색이고 가슴은 약간 갈색을 띠며 검정색의 세로줄이 있다. 배는 등쪽이 잿빛이나 각 마디마다 흰색 ·붉은색 ·검정색의 가로무늬가 3개 있다. 주락시 : 주락시나방 한불 : 상당히 많은 것들이 한 표면을 덮고 있는 상태 돌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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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 고야(古夜)시(詩)/백석 2015. 3. 16. 05:16
아배는 타관 가서 오지 않고 산비탈 외따른 집에 엄매와 나와 단둘이서 누가 죽이는 듯이 무서운 밤 집 뒤로는 어느 산골짜기에서 소를 잡어먹는 노나리꾼들이 도적놈들같이 쿵쿵거리며 다닌다 날기멍석을 져간다는 닭보는 할미를 차 굴린다는 땅 아래 고래 같은 기와 집에는 언제나 니차떡에 청밀에 은금보화가 그득하다는 외발 가진 조마구 뒷산 어느메도 조마구네 나라가 있어서 오줌 누러 깨는 재밤 머리맡의 문살에 대인 유리창으로 조마구 군병의 새까만 대가리 새까만 눈알이 들여다보는 때 나는 이불 속에 자즐어붙어 숨도 쉬지 못한다 또 이러한 밤 같은 때 시집갈 처녀 막내 고무가 고개 너머 큰집으로 치장감을 가지고 와서 엄매와 둘이 소기름에 쌍심지의 불을 밝히고 밤이 들도록 바느질을 하는 밤 같은 때 나는 아릇목의 샅귀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