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백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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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 고방 (庫房)시(詩)/백석 2014. 8. 4. 16:30
낡은 질동이에는 갈 줄 모르는 늙은 집난이같이 송구떡이 오래도록 남어 있었다 오지항아리에는 삼촌이 밥보다 좋아하는 찹쌀탁주가 있어서 삼촌의 임내를 내어가며 나와 사춘은 시큼털털한 술을 잘도 채어먹었다 제삿날이면 귀머거리 할아버지가 예서 왕밤을 밝고 싸리꼬치에 두부산적을 꿰었다 손자아이들이 파리떼같이 모이면 곰의 발 같은 손을 언제나 내어둘렀다 구석의 나무말쿠지에 할아버지가 삼는 소신 같은 집신이 둑둑이 걸리어도 있었다 옛말이 사는 컴컴한 고방의 쌀독 뒤에서 나는 저녁 끼때에 부르는 소리를 듣고도 못들은 척하였다 집난이 - 시집간 딸 질동이 : 질그릇 만드는 흙을 구워 만든 동이 송구떡 - 송기(松肌)떡. 소나무 속껍질에 멥쌀가루를 섞어 만든 절편 오지항아리 : 흙으로 초벌 구운 위에 오짓물을 입혀 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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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 편지시(詩)/백석 2014. 2. 15. 14:07
남쪽 바닷가 어떤 낡은 항구의 처녀 하나를 나는 좋아하였습니다. 머리가 까맣고 눈이 크고 코가 높고 목이 패고 키가 호리낭창하였습니다. 그가 열 살이 못 되어 젊디젊은 그 아버지는 가슴을 앓아 죽고 그는 아름다운 젊은 홀어머니와 둘이 동지섣달에도 눈이 오지 않는 따뜻한 이 낡은 항구의 크나큰 기와집에서 그늘진 풀같이 살아왔습니다. 어느 해 유월이 저물게 실비 오는 무더운 밤에 처음으로 그를 안 나는 여러 아름다운 것에 그를 견주어 보았습니다. 당신께서 좋아하시는 산새에도 해오라비에도 또 진달래에도 그리고 산호에도…… 그러나 나는 어리석어서 아름다움이 닮은 것을 골라낼 수 없었습니다. 총명한 내 친구 하나가 그를 비겨서 수선이라고 하였습니다. 그제는 나도 기뻐서 그를 비겨 수선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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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시(詩)/백석 2014. 2. 3. 11:49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어서 머리에 손깍지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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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 북방(北方)에서시(詩)/백석 2014. 2. 3. 11:42
-정현웅(鄭玄雄)에게 아득한 옛날에 나는 떠났다 부여(夫餘)를 숙신(肅愼)을 발해(渤海)를 여진(女眞)을 요(遙)를 금(金)을 흥안령(興安嶺)을 음산(陰山)을 아무우르를 숭가리를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 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다 나는 그때 자작나무와 이깔나무의 슬퍼하든 것을 기억한다 갈대와 장풍의 붙드든 말도 잊지 않었다 오로촌이 멧돌을 잡어 나를 잔치해 보내든 것도 쏠론이 십리길을 따러나와 울든 것도 잊지 않었다. 나는 그때 아무 이기지 못할 슬픔도 시름도 없이 다만 게을리 먼 앞대로 떠나 나왔다 그리하여 따사한 햇귀에서 하이얀 옷을 입고 매끄러운 밥을 먹고 단샘을 마시고 낮잠을 잤다 밤에는 먼 개소리에 놀라나고 아침에는 지나가는 사람마다에게 절을 하면서도 나는 나의 부끄러움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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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 가즈랑집시(詩)/백석 2014. 2. 3. 11:35
승냥이가 새끼를 치는 전에는 쇠메 든 도적이 났다는 가즈랑고개 가즈랑집은 고개 밑의 산 너머 마을서 도야지를 잃는 밤 짐승을 쫓는 깽제미 소리가 무서웁게 들려오는 집 닭 개 짐승을 못 놓는 멧도야지와 이웃사춘을 지나는 집 예순이 넘은 아들 없는 가즈랑집 할머니는 중같이 정해서 할머니가 마을을 가면 긴 담뱃대에 독하다는 막써레기를 몇 대라도 붙이라고 하며 간밤엔 섬돌 아래 승냥이가 왔었다는 이야기 어느메 산골에선간 곰이 아이를 본다는 이야기 나는 돌나물김치에 백설기를 먹으며 옛말의 구신집에 있는 듯이 가즈랑집 할머니 내가 날 때 죽은 누이도 날 때 무명필에 이름을 써서 백지 달아서 구신간시렁의 당즈깨에 넣어 대감님께 수영을 들였다는 가즈랑집 할머니 언제나 병을 앓을 때면 신장님 단련이라고 하는 가즈랑집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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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 여승시(詩)/백석 2014. 1. 19. 12:27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늬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설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가지취 : 취나물의 일종. 금덤판 : ① 금광. 금점판 ② 조선 때, 호조나 공조에 딸려 금광(金鑛)의 세금을 거두던 관청 섶벌 : 재래종 일벌. 머리오리 : 머리카락의 가늘고 긴 가닥. (그림 : 박준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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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시(詩)/백석 2014. 1. 15. 15:04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마가리 : 오막살이 고조곤히 : 고요히. 소리없이 (그림 : 김수진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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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 흰 바람벽이 있어시(詩)/백석 2014. 1. 8. 17:48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샷쯔가 어두운 그림자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어 대구국을 끊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