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백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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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 수라(修羅)시(詩)/백석 2014. 1. 8. 17:47
거미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어니젠가 새끼 거미 쓸려 나간 곳에 큰 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 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싹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 알만 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작은 새끼 거미가 이번엔 큰 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 미나 분명히 울고불고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아나 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이 보드러운 종이에 받아 또 문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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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 두보(杜甫)나 이백(李白)같이시(詩)/백석 2014. 1. 8. 17:46
오늘은 정월 보름이다 대보름 명절인데 나는 멀리 고향을 나서 남의 나라 쓸쓸한 객고에 있는 신세로다 옛날 두보나 이백 같은 이 나라의 시인도 먼 타관에 나서 이 날을 맞은 일이 있었을 것이다 오늘 고향의 내 집에 있는다면 새 옷을 입고 새 신도 신고 떡과 고기로 억병 먹고 일가친척들과 서로 모여 즐거이 웃음으로 지날 것이언만 나는 오늘 때 묻은 입던 옷에 마른 물고기 한 토막으로 혼자 외로이 앉어 이것저것 쓸쓸한 생각을 하는 것이다 옛날, 그 두보나 이백 같은 이 나라의 시인도 이날 이렇게 마른 물고기 한 토막으로 외로이 쓸쓸한 생각을 한 적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제 어느 먼 외진 거리에 한 고향 사람의 조고마한 가업집이 있는 것을 생각하고 이 집에 가서 그 맛스러운 떡국이라도 한 그릇 사 먹으리라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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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 바다시(詩)/백석 2014. 1. 8. 17:45
바닷가에 왔드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뒤선 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은 것만 같구려 바닷가는 개지꽃에 개지 아니 나오고 고기비눌에 하이얀 햇볕만 쇠리쇠리하야 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섧기만 하구려 지중지중 : 아주 천천히 걸으면서 생각에 잠기는 모습(의태어) 개지꽃 : 나팔꽃의 방언 쇠리쇠리하야 : 눈이 부셔. 눈이 시려. (그림 : 정인성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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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 탕약(湯藥)시(詩)/백석 2014. 1. 8. 17:45
눈이 오는데 토방에서는 질화로 위에 곱돌탕관에 약이 끓는다 삼에 숙변에 목단에 백복령에 산약에 택사의 몸을 보한다는 육미탕(六味湯)이다 약탕관에서는 김이 오르며 달큼한 구수한 향기로운 내음새가 나고 약이 끓는 소리는 삐삐 즐거웁기도 하다 그리구 다 달인 약을 하이얀 약사발에 밭어놓은 것은 아득하니 깜하야 만년(萬年) 옛적이 들은 듯한데 나는 두 손으로 고이 약그릇을 들고 이 약을 내인 옛사람들을 생각하노라면 내 마음은 끝없이 고요하고 또 맑어진다 *곱돌탕관-광택이 나는 곱돌은 깎아서 만든 약탕관 *숙변-숙지황. 한약재의 한 가지 *백봉령-솔뿌리에 기생하는 복령에서 나오는 한약재. 땀과 오줌의 조절에 효험이 있고 담증, 부증, 습증, 설사에 쓰임 *산약-마의 뿌리. 강장제이며 유정, 몽설, 요통, 설사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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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 국수시(詩)/백석 2014. 1. 3. 22:35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사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옆 은댕이 예대가리밭에서 하로밤 뽀오얀 흰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연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옛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여름볕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으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텁한 꿈을 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둔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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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 여우난골족(族)시(詩)/백석 2013. 12. 28. 10:14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루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리고무 고무의 딸 이녀 작은 이녀 열여섯에 사십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고무 고무의 딸 승녀 아들 승동이 육십리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산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옷이 정하든 말 끝에 섧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무 고무의 딸 홍녀 아들 홍동이 작은 홍동이 배나무접을 잘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섬에 반디젓 담그러 가기를 좋아하는 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