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화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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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은 - 오래된 연가시(詩)/이화은 2020. 8. 1. 17:37
사랑하는 일에 목숨 걸겠다고 말한 적 있습니다 당신 죽으면 따라 죽겠다고 언약한 적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은반지 같아서, 넉잠 자고 난 누에 같아서 언약한 그 손가락 자꾸 아팠습니다 그 사랑 몸에 맞지 않았습니다 은반지 빼서 돌려주고 나니 왼손 약지에 오래오래 그늘이 남았습니다 그 그늘 닦아도 빛나지 않았습니다 강가에 앉아 빗줄기가 만드는 파문을 보며 그 둥근 물무늬가 그늘인 줄 알았습니다 맞지 않아 돌려준 사랑인 줄 알았습니다 다 자란 누에처럼 굵어진 빗줄기 서럽게 웅크린 내 왼쪽 날개 후려치고 뛰어갑니다 (그림 : 박혜라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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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은 - 화법(花法)시(詩)/이화은 2019. 9. 16. 22:10
언니가 쓸개를 떼어냈다고 한다 속칭, 쓸개 빠진 년이 된 것이라는데 오늘 아침 내 귀에 쏟아 부은 화(火)는 여전히 뜨겁다 활활 그 꽃불은 내 왼쪽 귀 하나를 다 태우고도 남을만하다 쓸개라는 쓰고 독한 말은 다만 상징이었을까 실체 없는 불꽃에 타 버린 내 귀는, 부호였을까 물음표처럼 생긴 귓바퀴는 상징과 부호로 가득 찬 몸속으로 매일 밀어 넣는 희고 둥근 한 움큼의 알약은 사탕발림인지도 몰라 몸은 의외로 살짝 어리석어서 언니의 단순한 화법은 여전히 화(火)법이니 이 아침 내 귀는 질문을 잠깐 벗어두고 나팔꽃처럼 방긋 웃어줄 수밖에 (그림 : 허나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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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은 - 중저가의 기쁨시(詩)/이화은 2019. 9. 16. 22:07
터미널 지하상가에서 산 민소매 원피스가 나를 기쁘게 한다 중저가의, 비밀 연애처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헌옷 속에 숨겨두었다가 어느 마음 깜깜한 날 깜짝 나를 놀래켜주리라 저 원피스와 나는 먼 내일을 약속하지 않아도 된다 딱 한 철 기쁘면 그만이다 느닷없는 소나기를 핑계 삼아 저급하게 슬쩍 옆구리에 달라붙어도 좋아 입 싼 여자처럼 펄렁 허벅지의 흰 살을 노출시켜도 눈 흘기며 나무라는 듯 봐 줄 것 같은, 이제 남자가 나를 설레게 할 수 없는 저음의 계절에 미래는 짧을수록 좋다고 막다른 골목에 선 절박한 연인처럼 함부로 구기거나 얼룩을 만들어 탕진하고 싶은, 조금은 싼티 나는 (그림 : 정종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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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은 - 누가 봐도시(詩)/이화은 2019. 9. 16. 22:05
휴일 아침 한산한 지하철 역 누가 봐도 노인, 에게 다가 간 역무원 아저씨 다짜고짜 주민증을 내놓으라 한다 따닥 지하철 공짜표를 의심하는 눈초리다 증을 확인하고서도 갸웃갸웃 아니 이렇게 젊어 보일 수가! 미안한 듯 뒷통수를 긁적거린다 일행을 기다리느라 한참을 앉아 있으려니 역무원 아저씨 속내가 환히 보인다 누가 봐도 노인, 마다 일부러 나이를 확인하고 왜 이리 젊으시냐고 따지 듯, 저 아름다운 시비 느닷없이 청춘을 돌려받은 듯 불심검문을 당하고서도 스멀스멀 배어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노인들 계단을 내려가는 굽은 허리가 슬그머니 펴지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그날 휴일의 지하철은 누가 봐도 청춘들이 무임승차를 자행한 싱싱한 불법천지의 하루였다 (그림 : 남일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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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은 - 10 년시(詩)/이화은 2019. 9. 16. 21:59
십 년 후에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귀때기 새파란 청보리 같은 당신이 물었다 우리는 십 년을 채 썰어 나물을 무치고 국을 끓였다 십 년을 곱게 빚어 아이를 만들었다 집을 장만하고도 십 년은 야곱의 우물처럼 찰랑찰랑 늘 거기 있었다 반백의 당신이 문득 십 년을 뒤적일 때 당신의 옆얼굴이 조금 쓸쓸해 보였을 뿐 십 년은 자고 나도 자고 나도 다시 십 년이었다 줄어들지 않는 쌀독이었다 어느 날 당신이 다시 물었다 천천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십 년 후에 우리는 어떻게 될까 깜짝 놀라 돌아보니 그 많은 십 년을 누가 다 먹었을까 청보리 밭은 벌써 갈아엎었다하고 십 년이 수북하던 바구니는 텅 비었다 십 년만 십 년만 십 년을 입에 달고 살던 어머니는 잔디가 자라지 않는 척박한 봉분이 되었다 도둑맞은 십 년은 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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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은 - 세상의 모든 2절시(詩)/이화은 2019. 5. 31. 19:29
‘동백아가씨’도 ‘연분홍 치마’도 2절이 좋더라 1절에서 겨우 목청 푼 슬픔이 2절에 가서야 시리게 늑골로 스며들지요 산길 가다보면 가슴에 이름표 매단 나무들 이름 밑에 간단한 약력도 곁들였는데요 ‘국수나무’가 1절이라면 ‘장미과’ 이름보다 조금 낮은 목소리가 2절이지요 1절의 그늘에 살짝이 숨어 하고 싶은 말 다 하는 게 2절이지요 속치마 바람에 맨발이 부끄러운 백목련 꽃말 같은 거지요 사랑도 2절이 좋다는 말에 반짝 이슬 같은 당신은 2절의 사랑까지 아프게 다녀온 사람이지요 당신은 분명 장미과예요 (그림 : 한영수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