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박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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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천 - 찔레꽃시(詩)/박상천 2023. 5. 8. 19:05
아파트 창문으로 넝쿨을 뻗어 올라온 하얀 찔레꽃이 피었습니다. 당신이 심어놓은 것이지요. 하얀 찔레꽃이 좋다며 어렵게 어렵게 구해서 심어놓은 그 꽃이 피었네요. 작년에도 피었을 테고 재작년에도 피었을 텐데 그런데 꽃을 본 기억이 없습니다. 다른 꽃들도 눈에 보이지 않았어요. 당신이 떠난 후 꽃이 피어도 내겐 보이지 않았나 봅니다. 그런데 올해 갑자기 꽃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당신 떠난 지 3년, 벌써 이렇게 안정이 되어가는 건가요? 그래서 갑자기 꽃이 보이기 시작한 올봄엔오히려 당신에게 미안한 생각이 드네요. 내 마음에 정좌한 당신을 보듯 흰 꽃잎 속 한가운데 들어앉은 노란 꽃술을 잠시 들여다봅니다. (그림 : 한희원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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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천 - 살다 보면 살아진다시(詩)/박상천 2022. 5. 23. 21:04
‘살다 보면’이라는 노래가 있다. “그저 살다 보면 살아진다.” “그저 살다 보면 살아진다.” 당신이 세상을 떠난 후 나는, 차를 몰고 가다가 길가에 세우고 한참을 울던 시간도 있었지만 살다 보니 살아졌다. 밥을 먹다가도 갑자기 울컥하며 목이 메어 한참을 멍하니 있는 때도 많았지만 살다 보니 살아졌다. 터벅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시간도 많아졌지만 살다 보니 살아졌다. 피어나는 꽃들조차 그렇게 싫더니만 살다 보니 살아졌다. 거지 같다 정말 거지 같다, 내가 살아가는 시간들에 대해 속으로 욕을 하며 살았지만 그 시간들도 그렇게 지나가고 살다 보니 살아졌다. 그저 살다 보면 살아진다. (그림 : 유예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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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천 - 나팔꽃시(詩)/박상천 2020. 4. 11. 12:20
아파트 앞마당에 심은 나팔꽃 덩굴이 뻗어나가도록 줄 하나 걸어주었다. 나팔꽃의 꽃말이 허무한 사랑이라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매일매일 덩굴손으로 그 줄을 붙잡고 온몸을 꼬아가며 길을 가는 나팔꽃. 나팔꽃의 꽃말이 왜 허무한 사랑일까. 길이 끝난 곳에 이르자 마침네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지만 더 이상 붙잡을 끈이 없다는 걸 알아차린 그는 이내 시들어간다. 사랑의 줄타기, 온 힘을 다해 뻗어나가 보지만 어느 곳엔가 이르면 길이 끊긴다. 오늘도 그렇게 애써 길을 가고 있는 나팔꽃의 꽃말은 허무한 사랑이다. (그림 : 이상희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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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천 - 시간의 사포질시(詩)/박상천 2020. 3. 3. 14:28
시간의 거친 사포(砂布)질에 이젠 겨우 어렴풋한 그림자만이 남았습니다. 눈부셨던 빛깔을 문질러 지우고 선명했던 형체를 문질러 지우고 그림자 같은 대강의 모습만을 남겨놓은 시간의 사포질. 겨울이 되자 억새풀들이 하얀 시간의 불꽃을 머리에 이고 서 있습니다. 그 풀숲에는 새들이 몸을 숨기고 있습니다. 바람이 그 사이를 가르고 지나갑니다. 억새풀들은 서로 몸을 부딪치며 까르르 웃음을 터뜨립니다. …… 보고 싶습니다. 봄 햇살이 참 따뜻하네요. 햇살은 연두 잎에 살그머니 내려앉더니 살금살금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 부드러운 발걸음이 느껴집니다. 햇살의 발걸음이 간지러운 듯 몸을 꼬는 새 연두 잎이 참 행복해 보입니다. ……늘 그립습니다. 풍경 속의, 억새풀 하얀 풀꽃도 터지는 웃음소리도 햇살의 부드러운 발걸음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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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천 - 고주랑 망태랑시(詩)/박상천 2018. 10. 25. 11:31
왜 이리 술맛이 좋은가 얼어붙은 겨울 저녁, 저 혼자 돌이 된 사내, 그 사내 깨워서 술친구 만들어 주거니 받거니 잔술 마시는 밤 왜 이리 술맛이 화끈한가 눈 내리는 겨울 하늘, 저 혼자 눈이 된 여자, 그 여자 불러서 눈사람 만들고 너 한 잔 나 한 잔 병술을 마시는 밤 왜 이리 술맛이 푸근한가 하늘이불 둘러쓰고 내 안에 삭히는 누룩, 고주야 망태야 술친구 삼아서 별과 달 모두가 권주가 부르는 밤 왜 이리 감칠맛 나나 알음알이 다 버리니 나조차 내 이름 몰라 장자야 설두야 바둑아 호랑아 술태백 되어서 딴 세상 만드는 밤 왜 이리 술맛이 나나 (그림 : 장용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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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천 - 내 생의 봄날은 ?시(詩)/박상천 2018. 3. 13. 12:24
'내 생의 봄날은 간다'며 목에 핏대를 세우고 캔이 노래를 부른다. 내 생의 봄날? 그래, 내 생의 봄날은 언제였을까? 비린내 나는 부둣가를 내 세상처럼 누비던 때였을까? 두 주먹으로 또 하루를 겁 없이 살아가던 때였을까? 아니, 내게는 그런 날들이 없었지. 그렇다면, 시린 고독과 악수하며 외길을 걸어오던 때였을까? 아니, 그런 날들도 내겐 없었지. 그렇다면, 내 상처를 끌어안은 그대가 곁에 있어 행복하던 때였을까? 글쎄? 내 상처를 끌어안은 그대가 있었나? 그렇다면, 촛불처럼 짧은 사랑 내 한 몸 아낌없이 바치려 했던 때였을까? 그런 그런 때는 있었지. 그때가 봄이었을까? 그때는 여름이라 할 수 있지 않나? 내 생의 봄날이 어떤 때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하여튼 내 생의 봄날은 그렇게 가버리고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