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박상천
-
박상천 - 적산거리 126,824km시(詩)/박상천 2018. 2. 15. 16:37
주유소에서 차에 기름을 채우다 문득 주행계기판을 들여다보니 구간거리 387km 적산거리 126,824km 다 연소하지 못한 배기가스를 푹푹거리며 달려온 내 인생의 타이어 자국을 주행계기판이 몰래 기록해두었구나. 126,824의 숫자 속엔 서울의 피곤과 한숨이 긴 자동차의 행렬만큼이나 늘어서 있고 동해바다나 지리산 혹은 내 고향의 여유와 웃음도 간혹 섞여 있으리라. 돌아보면 126,824km를 달려온 내 인생의 타이어 자국은 흔적도 없고 찰랑거리던 연료를 다 소진해버린 연료통처럼 가슴이 휑하다.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아쉬움에,낡아가는 마음 한 구석에선 자꾸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룸미러에 비치는 흰머리카락이 새삼스럽다. 기름을 채우고 다시 단추를 눌러 구간거리계를 0으로 돌려보지만 결코 0으로 돌려놓을 ..
-
박상천 - 작취미성(昨醉未醒)의 봄날 아침시(詩)/박상천 2018. 2. 7. 18:51
햇살 밝은 봄날 아침이 나른하다. 안주 없이 마신 때문은 아니다. 삶의 어느 구석엔가 숨어 있다가 불쑥불쑥 얼굴을 내미는 그리운 길과 그 길을 오가는 시간들과 손을 뻗어 잡을 수 없는 간절한 사랑의 그림자에 애매한 술병만 자꾸 쓰러졌다. 한 잔을 마시며, 잊으리라 그리움의 꽃 이파리. 또 한 잔을 마시며, 버리리라 그리움의 초록 향기. 어둠 속에선 봄날의 벚꽃 잎들이 별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밤새 마신 술이 아직도 위장 속에서 계곡물처럼 흐르는데 고개를 드니 먼 데 산이 눈에 어른거리고 씩씩거리며 물오르는 나무들의 숨결이 들린다. 문득 한 줄기 바람에 힘없이 흩날리는 벚꽃 잎, 벚꽃 잎, 벚꽃 잎, 얼굴엔 다시 취기가 오른다. 어제의 술이 깨지 않아 아직도 나는 어제에 있다. (그림 : 백중기 화백)
-
박상천 - 오동도시(詩)/박상천 2017. 7. 11. 10:38
여수 앞바다엔 전라도 사투리 같은 섬이 하나 떠있다. 어느 한 군데 모나지 않은 전라도 사투리 같은 섬, 오동도 오동도 시누대 숲길로 들어서면 '그렁께 그렁께' 맞장구치는 정겨운 사투리가 바람소리로 흘러나오고 숲길, 나무 가지 사이사이론 '아따 좋소잉' 처럼 맑은 소리의 햇살이 내린다. '그런당가 그런당가' 서로를 보듬어주는 넉넉하고 푸근한 나무 그늘, 그 숲길을 오르면 '오오메, 오오메,' 감탄사처럼 붉은 동백꽃이 피어나고 계단을 내려가 바다에 이르면 용굴 저 깊은 곳에서는 '어째야 쓰까잉, 어째야 쓰까잉' 애가 타는 이야기도 흘러나온다. 모난 바위에 와 온몸을 부딪치면서도 오랜 만에 만난 친구에게 '밥은 묵고 댕기냐' 며 오히려 안부를 믇는 파도, 객지로만 떠돌던 나는 그만 눈이 시큰해진다. 남도 끝..
-
박상천 - 낮술 한잔을 권하다시(詩)/박상천 2014. 9. 1. 14:27
낮술에는 밤술에 없는 그 무엇이 있는 것 같다. 넘어서는 안 될 선이라거나, 뭐 그런 것. 그 금기를 깨트리고 낮술 몇 잔 마시고 나면 눈이 환하게 밝아지면서 햇살이 황홀해진다.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은 아담과 이브의 눈이 밝아졌듯 낮술 몇 잔에 세상은 환해진다. 우리의 삶은 항상 금지선 앞에서 멈칫거리고 때로는 그 선을 넘지 못했음을 후회하는 것.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라. 그 선이 오늘 나의 후회와 바꿀 만큼 그리 대단한 것이었는지. 낮술에는 바로 그 선을 넘는 짜릿함이 있어 첫 잔을 입에 대는 순간, 입술에서부터 ‘싸아’ 하니 온몸으로 흩어져간다. 안전선이라는 허명에 속아 의미 없는 금지선 앞에 서서 망설이고 주춤거리는 그대에게 오늘 낮술 한잔을 권하노니, 그대여 두려워 마라. 낮술 한잔에 세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