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박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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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천 - 낡음의 평화에 대하여시(詩)/박상천 2013. 12. 30. 09:49
깊게 패인 노인의 주름살, 그 삶의 속살무늬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은 삶에 대한 추억이나 회한이 아니다. 낡아가는 것에서 우리는 평화를 만나고 편안함을 느낀다. 세월이 흐를수록 우리의 마음의 울타리는 점차 허물어지고 굳게 걸고 있던 빗장도 허술해지지만 울타리가 허물어지고 빗장이 허술해질수록 우리의 평화는 굳건해진다. 철조망의 가시에 녹이 슬듯 우리의 삶은 쉽게 낡아가고 나무 울타리의 결무늬가 확연히 드러나듯 우리의 삶은 깊게 주름이 패이지만 세월의 저 뒤켠, 묵직한 종소리에 실려온 녹이 슨 철조망의 평화, 주름살이 내려앉은 사랑의 편안함. (그림 : 우용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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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천 - 볼펜은 왜 다시 연필이 되었나시(詩)/박상천 2013. 12. 30. 09:46
부드럽고 편안한 나날이었다. 지우개는 그 흔적을 지우지 못해 볼펜은 언제나 볼펜으로 남아있었다. 그는 자신을 결코 깎지 않았지만 그는 점점 낡아갔다. 빈 가슴에는 잉크를 채워도 채워도 늘 부족했다. 항상 빈 가슴으로 남게 되는 스스로 버린 자신을 보았다. 추하게 낡으며 살아가지 않고 스스로를 깎아 사라지는 방법을 생각했다. 볼펜은 더 이상 잉크를 채우는 일을 포기하고 자신의 몸에 칼을 들이밀어 남은 잉크마저 쏟아버렸다. 빈 가슴에 새 살이 돋아오르고 그는 자신의 몸을 조금씩 깎아가며 사는 연필이 되었다. 지우개는 또한 불필요한 그의 흔적을 지워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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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천 - 슬픔의 정체시(詩)/박상천 2013. 12. 30. 09:44
뒤에서 슬그머니 나를 따라다니는 그러나 뒤돌아보면 보이지 않는 슬픔의 정체를 보고 싶어요. 연두빛 새잎이 싱그러운 이 봄날의 기쁨 속에서 문득 내 목덜미를 잡아끄는, 맑고 고운 햇살이 눈부신 황홀 속에서 문득 내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한 잔 술을 앞에 두고 즐거워 웃고 있을 때 내 뒤 머리카락을 살짝 건드리는, 고속도로를 달려갈 때 과일을 깎고 있을 때 겨울 바닷가에 서 있을 때 육교 위로 다 올라섰을 때 문득 내 등을 확, 떠미는 슬픔의 정체 백밀러의 사각지대(死角地帶)에 숨은 이 슬픔의 정체를 보고 싶어요. (그림 : 이기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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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천 - 눈물은 우리의 마음을 씻어주네시(詩)/박상천 2013. 12. 30. 09:42
아침에 택시를 타고 가며 라디오 방송을 들었다. 그 방송에서는 어느 여성이 보내온 편지를 낭독하고 있었다. 가난하지만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였다. 그래, 가난하지만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자꾸만 눈물이 흘렀다. 흐르는 눈물을 택시 운전기사에게 보이기 싫어 나는 고개를 돌리고 창 밖만을 바라다보았다. 손으로 눈물을 닦으면 흘리는 눈물을 들킬까봐 흐르는 눈물을 그냥 내버려두었다. 뜨거운 눈물이 자꾸 볼 위를 타고 흘러 내렸다. 창 밖에는 밝은 햇살이 내리고 있었지만 자꾸만 흐려졌다. 흐려졌다. 흐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운전사 아저씨가 조용히 길가에 차를 세웠다. 조금 쉬었따 가자는 그의 말에 대답도 하지 못했다. 눈물은 조용히 우리의 마음을 씻어 주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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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천 - 지나치지 않음에 대하여시(詩)/박상천 2013. 12. 30. 09:39
한 잔의 차를 마시며 지나치지 않음을 생각한다. 아침 신문도 우울했다. 지나친 속력과 지나친 욕심과 지나친 신념을 바라보며 우울한 아침, 한잔의 차는 지나치지 않음을 생각케한다. 손바닥 그득히 전해오는 지나치지 않은 찻잔의 온기 가까이 다가가야 맡을 수 있는 향기의 아름다움을 생각한다. 지나친 세상의 어지러움을 끓여 차 한 잔을 마시며 탁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세상의 빛깔과 어디 한 군데도 모나지 않은 세상살이의 맛을 생각한다. (그림 : 설종보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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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천 - 나는 절망한다시(詩)/박상천 2013. 12. 30. 09:37
나는 절망한다 절망의 시작을 붙잡고 절망하고 절망의 끝에 서서 또다시 절망한다. 내가 보는 것 내가 듣는 것 내가 먹는 것 내가 만지는 것 내가 냄새맡는 것에 절망한다 절망의 계단을 오르며 절망하고 절망의 지하철을 타고 가며 절망하고 절망의 술병을 비우며 절망하고 절망의 컴퓨터를 두드리다가 절망하고 절망의 전화를 걸다가 절망하고 절망의 담배를 피우다 절망한다. 절망의 바다에서 절망을 붙잡고 절망하고 절망의 늪에서 절망을 끌어안고 절망하고 절망의 강가에서 절망을 바라보며 절망하고 절망의 사막에서 절망을 날리며 절망하고 절망의 벼랑에서 절망을 버리며 절망한다. (그림 : 이송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