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천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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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 - 발자취시(詩)/천양희 2023. 3. 7. 16:18
사람이 무서운 건 관계 때문이고 관계가 힘든 건 마음 때문이라는 문장을 읽었을 때 한 구절 한 구절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내게로 왔다 발자취를 생각한 건 그때부터였다 사람과 사람이 가까워지는 것은 섬과 섬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라고 서로가 서로에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는 붉은 문장을 이해한 건 혹하지 않으려고 애쓰던 때였다 사랑과 인식의 출발에 눈을 뜬 건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는 문장을 지운 뒤였다 한 사람의 마음도 살리지 못하면서 관계의 소통과 유대에 대해 말할 수는 없었다 모든 것이 내 탓이라고 닻을 내린 건 귀가 순해진 뒤였겠지 그때 비로소 나는 사람이 궁금한 사람이었고 마침내 나는 사람이 힘든 사람이란 걸 알았다 아름다움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길이보다 깊이를 생각하는 새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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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 - 하루는 하나의 루머가 아니다시(詩)/천양희 2022. 1. 15. 10:44
새벽이 왁자지껄 길을 깨운다 가로수들이 벌떡 일어서고 눈에 불을 켜고 가로등이 소의 눈처럼 끔벅거린다 땅은 꿈쩍 않는데 차들이 바쁘다 발을 구른다 구를수록 눈덩이처럼 커지는 하루 구르는 것이 하루의 일이라서 일의 속이 오래 덜컹거린다 어둠 속이든 가슴속이든 속은 들수록 깊어지나 바깥은 하루살이 아침에 피었다 저녁에 진다 지는 것들은 후기(後記)가 없다 인생은 얼굴에 남는다고 말할 뿐이다 나는 왠지 세상에서 서늘하여 지는 해를 붙잡았다 놓는다 잘 보내고서 기억하면 되는 걸 그러면 되는 걸 하루가 천년 같다고 생각해본 사람들은 안다 하루는 하나의 루머가 아니다 오늘 하루는 내가 그토록 살고 싶은 내일이다 (그림 : 김성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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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 - 그림자시(詩)/천양희 2021. 4. 26. 10:48
마음에 지진이 일어날 때마다 마른 가지 몇개 분질렀습니다 그래도 꺾이지 않는 건 마음입니다 마음을 들고 오솔길에 듭니다 바람 부니 풀들이 파랗게 파랑을 일으킵니다 한해살이풀을 만날 때쯤이면 한 시절이 간다는 걸 알겠습니다 나는 그만 풀이 죽어 마음이 슬플 때는 지는 해가 좋다고 말하려다 그만두기로 합니다 오솔길은 천리로 올라오는 미움이라는 말을 지웁니다 산책이 끝나기 전 그늘이 서늘한 목백일홍 앞에 머뭅니다 꽃그늘 아래서 적막하게 웃던 얼굴이 떠오릅니다 기억은 자주 그림자를 남깁니다 남긴다고 다 그림자이겠습니까 '하늘 보며 나는 망연히 서 있었다' 어제 써놓은 글 한줄이 한 시절의 그림자인 것만 같습니다 (그림 : 박영규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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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 - 진실로 좋다시(詩)/천양희 2020. 7. 5. 17:16
노을에 물든 서쪽을 보다 든다는 말에 대해 생각해본다 요즘 들어 든다는 말이 진실로 좋다 진실한 사람이 좋은 것처럼 좋다 눈으로 든다는 말보다 마음으로 든다는 말이 좋고 단풍 든다는 말이 시퍼런 진실이란 말이 좋은 것처럼 좋다 노을에 물든 것처럼 좋다 오래된 나무를 보다 진실이란 말에 대해 생각해본다 요즘 들어 진실이란 말이 진실로 좋다 정이 든다는 말이 좋은 것처럼 좋다 진실을 안다는 말보다 진실하게 산다는 말이 좋고 절망해봐야 진실한 삶을 안다는 말이 산에 든다는 말이 좋은 것처럼 좋다 나무 그늘에 든 것처럼 좋다 나는 세상에 든 것이 좋다 진실을 무릎 위에 길게 뉘였다 (그림 : 한귀원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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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 - 말시(詩)/천양희 2019. 10. 31. 11:29
어느날 나는 내가 생각한 것의 반만큼도 말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말의 성찬이나 말의 홍수 속에서 나는 오히려 말이 고팠다 고픈 말을 움켜쥐고 말의 때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쉬운 말들과 놀고 싶어서 말의 공터를 한번 힐끗 본다 참말은 문득 예리한 혀끝으로 잘려나가고 씨가 된 말이 땅끝으로 날아다닌다 말이 꽃을 피운다면 기쁘리. 말이 길을 낸다면 웃으리. 말은 누구에겐들 업(業)이 아니리 모든 말이 허망하여도 말의 추억은 아름다운 것이냐 우리는 누구나 쌓인 말의 나무 밑으로 돌아간다. (그림 : 조상희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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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 - 생각이 사람을 만든다시(詩)/천양희 2019. 3. 7. 11:10
이 생각 저 생각 하다 어떤 날은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막무가내 올라간다 고비를 지나 비탈을 지나 상상봉에 다다르면 생각마다 다른 봉우리들 뭉클 솟아오른다 굽은 능선 위로 생각의 실마리들 날아다닌다 뭐였더라, 뭐였더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의 바람소리 생각(生覺)한다는 건 생(生)을 깨닫는 것 생각하면 할수록 생(生)은 오리무중이니 생각이 깊을수록 생(生)은 첩첩산중이니 생각대로 쉬운 일은 세상에 없어 생각을 버려야 살 것 같은 날은 마음이 종일 벼랑으로 몰린다 생각을 버리면 안된다는 생각 생각만 하고 살 수 없다는 생각 생각 때문에 밤새우고 생각 때문에 날이 밝는다 생각이 생각을 놓아주지 않는다 지독한 생각이 사람을 만든다 (그림 : 최정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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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 - 2월은 홀로 걷는 달시(詩)/천양희 2019. 2. 6. 12:18
헤맨다고 다 방황하는 것은 아니라 생각하며 미아리를 미아처럼 걸었다 기척도 없이 오는 눈발을 빛인듯 밟으며 소리 없이 걸었다 무엇에 대해 말하고 싶었으나 말할 수 없이 말없이 걸었다 길이 너무 미끄러워 그래도 낭떠러지는 아니야, 중얼거리며 걸었다 열리면 닫기 어려운 것이 고생문(苦生門)이란 모르고 산 어미같이 걸었다 사람이 괴로운 건 관계 때문이란 말 생각나 지나가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며 걸었다 불가능한 것 기대한 게 잘못이었나 후회하다 서쪽을 오래 바라보며 걸었다 오늘 내 발자국은 마침내 뒷사람의 길이 된다는 말 곱씹으며 걸었다 나의 진짜 주소는 집이 아니라 길인가? 길에게 물으며 걸었다 (그림 : 권준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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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 - 그 말이 나를 삼켰다시(詩)/천양희 2019. 1. 25. 15:18
아름다움이 적을 이긴다기에 미소 짓는 이 꽃이 내일이면 진다는 걸 믿지 않았다 할 수 있을 때 장미 봉오리를 모아야 한다기에 한낮의 볕에 그늘 한 뼘 들여놓는 걸 잊지 않았다 불은 태울 수 없고 물은 물에 빠질 수 없다기에 사람이라도 좀 되어보자고 결심했다 끝없는 풍경은 밖에 있지 않고 안에 있다기에 세상에 드러나 부끄럽지 않은 것이 꽃밖에 더 있을까 생각했다 삶에는 이론이 없다기에 우리가 바로 세상이란 걸 알게 되었다 모든 것이 변했는데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기에 붓 쥔 자는 외로워 굳센 법이란 걸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갈피를 잡는 동안 그 말이 나를 삼켰다 (그림 : 김명숙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