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천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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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 - 겨울 길음동시(詩)/천양희 2019. 1. 25. 12:27
골목이 텅 비었다 개들도 주정꾼도 보이지 않는다 길 건너 육교 쪽 가로등이 뿌옇다 방범대원 딱딱이 소리 담을 넘는다 파출소 뒷길 부산상회 탁씨 갈매기 바다 위에…… 콧노래 부르며 덧문을 닫고 있다 늦은 밤 버스 종점 바람이 차다 빈 택시 한 대 총알처럼 지나간다 지가 빠르면 세월보다 빠름감 서울 와서 늙은 수선소집 목포댁 재봉틀 돌리며 중얼거린다 세상에는 왜 이리 고칠 것이 많은가 나도 나를 고치는 데 이십 년이 걸렸다 걸려 있는 빨랫줄 무슨 악연처럼 얽혀 있다 저 줄이… 그 집의 내력 끌고 왔을 것이다 마당 깊고 언덕길 너무 가파르다 누구나 절벽 하나쯤 품고 산다는 것일까 발끝이 벼랑이다 날마다 벼랑 끝을 기어오른다 정상 정복할 등산가처럼. (그림 : 박종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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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 - 겨울단장(斷章) 1시(詩)/천양희 2018. 12. 13. 00:17
이러지도 못하고 어쩔 수도 없을 때 마음은 낡은 기차 바퀴처럼 털털거린다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언제나 사랑은 귀일(歸一)하지 못했다 차창에는 두꺼운 상처같은 성에가 끼고 갑자기 내 입김속에 들어오는 창밖은 빈 들이다 빈 들이다 지나치는 일보다 더 빨리 빈 들은 지나간다 지난날의 구름조각들도 지나가 버린다 남은 것은 거친 들 바람속에 세워둔 몸뿐 몸 위에는 눈물같은 서리가 덮여 있다 길이 끝나기 전에는 이 길로 마냥 가면 이 겨울 눈보라 속에 놓이는 내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언제나 사랑은 귀일(歸一)하지 못했다. (그림 : 안기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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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 - 마들 종점시(詩)/천양희 2018. 5. 27. 10:13
봄비 내려 아침이 늦게 온다 마른 풀이 젖네,하면서 가로수들이 온몸에 힘을 쓴다 수락산 옆 마들 종점,첫차가 막 출발한다 아침하늘이 흐리고 깊다.바람이 생생 마음까지 들린다.하루를 겨루는 사람들 몇, 첫차에 오른다.꽃피운 나무들이 손을 흔든다 그에게 세상은 꽃피우기다 세상은 너무 힘이 세다니까 겨울 깊으면 봄이 온다고? 갈울근린공원이 봄으로 꽉찬다 늙은 청소부 비틀거리며 마당을 쓸고 있다 '봄날은 간다’ 연분홍치마가 봄바람에 뭐,봄바람?놀고 있네 하듯이 금방이라도 달려갈 것 같은 마들, 마(馬)의 들.말발굽 소리 들릴 것 같은 마들 종점에서 (그림 : 조성희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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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 - 외동, 외등시(詩)/천양희 2017. 12. 12. 20:56
나는 오래 여기 서 있었습니다 외동 1번지 다시는 저 다리 위에 저 정거장엔 가지 않으리라 내려가서 길바닥에 주저앉지 않으리라 갈퀴별자리 옮겨 앉는 날 밤이면 내 청춘의 붉은 바퀴 굴러가다 멈춘 것 보입니다 가슴을 조금 움직여 두근거려 보지만 그 길 따라 오는 사람 있겠습니까 나는 꿈을 가지지 않기로 합니다 날마다 골목이 나를 불러 꿈을 주고 날마다 골목이 나를 불러 꿈을 주고 세상 구석까지 따라가게 합니다 세상아, 너는 아프구나, 나는 얼굴을 돌리고 눈만 껌벅거렸습니다 늙은 느릅나무 뒤에는 주름진 황톳길이 구불텅거리고 어슬렁거리는 개들 옆으로 저 혼자 젖는 취객들이 많이 어두워져 돌아오고 있습니다 오늘밤 나는 신열에 들뜬 듯 머리를 싸매고 풀섶에 숨어 우는 벌레들의 울음을 사람의 말로 다 적기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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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 - 마음아시(詩)/천양희 2017. 11. 30. 12:27
마음아 아무곳에나 널 내려놓지마 어디나 다 사막이야 마음아 아무곳에나 들어가지마 어디나 다 늪이야 (그림 : 오광섭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