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천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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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 - 놓았거나 놓쳤거나시(詩)/천양희 2017. 8. 18. 18:48
내가 속해 있는 대낮의 시간 한밤의 시간보다 어두울 때가 있다 어떤 날은 너무 많은 나를 삼켜 배부를 때도 있다 나는 때때로 편재해 있고 나는 때때로 부재해 있다 세상에 확실한 무엇이 있다고 믿는 것만큼 확실한 오류는 없다고 생각한 지 오래다 불꽃도 타오를 때 불의 꽃이라서 지나가는 빗소리에 깨는 일이 잦다 고독이란 비를 바라보며 씹는 생각인가 결혼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이혼에 성공한 것이라던 어느 여성 작가의 당당한 말이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고 내게 중얼거린다 삶은 고질병이 아니라 고칠 병이란 생각이 든다 절대로 잘못한 적 없는 사람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사람뿐이다 언제부터였나 시간의 넝쿨이 나이의 담을 넘고 있다 누군가가 되지 못해 누구나가 되어 인생을 풍문 듣듯 산다는 건 슬픈 일이지 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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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 - 친구시(詩)/천양희 2017. 8. 14. 15:15
좋은 일이 없는 것이 불행한 게 아니라 나쁜 일이 없는 것이 다행한 거야 어느 날 친구가 내게 말했습니다 되는 일이 없다고 세상이나 원망하던 나는 부끄러웠습니다 더러워진 발은 깨끗이 씻을 수 있지만 더러워지면 안 될 것은 정신인 거야 어느 날 친구가 내게 말했습니다 되는 일이 없다고 세상에 투덜대던 나는 부끄러웠습니다 자기 하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은 실상의 빛을 가려버리는 거야 어느 날 친구가 내게 말했습니다 되는 일이 없다고 세상에 발길질이나 하던 나는 부끄러웠습니다 (그림 : 김순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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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 - 직소포에 들다시(詩)/천양희 2017. 6. 13. 11:33
폭포소리가 산을 깨운다. 산꿩이 놀라 뛰어오르고 솔방울이 툭, 떨어진다. 다람쥐가 꼬리를 쳐드는데 오솔길이 몰래 환해진다. 와! 귀에 익은 명창의 판소리 완창이로구나. 관음산 정상이 바로 눈앞인데 이곳이 정상이란 생각이 든다 피안이 이렇게 가깝다 백색 정토(淨土)! 나는 늘 꿈꾸어왔다 무소유로 날아간 무소새들 직소포의 하얀 물방울들, 환한 수궁(水宮)을. 폭포소리가 계곡을 일으킨다. 천둥소리 같은 우레 같은 기립박수소리 같은 ― 바위들이 몰래 흔들한다 하늘이 바로 눈앞인데 이곳이 무한천공이란 생각이 든다 여기 와서 보니 피안이 이렇게 좋다 나는 다시 배운다 절창(絶唱)의 한 대목, 그의 완창을. 직소포 (직소폭포 直沼瀑布) :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실상길 52 변산반도 국립공원에 속하는 옥녀봉, 선인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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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 - 생각은 꼬리가 길다시(詩)/천양희 2017. 4. 12. 12:30
밀려드는 생각에는 순서가 없지 생각은 낙타가 걷는 속도로 걷는 것 같아 생각이 길처럼 길어도 이만하면 되었다는 생각은 없는 거지 내가 아무리 아무것도 아닌 것만 생각하자 바람만 생각하자해도 생각은 언제나 나를 받아내는 나는 생각의 자식 바람이 불 때마다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부터 나무처럼 우두커니 서서 살고 싶은 생각이 없던 때를 생각하는 거지 평생을 생각만큼 살지 못했으므로 나는 늘 생각을 들고 살지 잘라도 잘라도 생각은 꼬리가 길어 생각 끝에 길이 있는 것이지 (그림 : 우창헌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