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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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수 - 찔레꽃시(詩)/이외수 2017. 9. 7. 22:51
마음으로만은 사랑을 할 수 없어 밤마다 편지를 썼었지 서랍을 열면 우울한 스무살 가슴앓이 사어(死語)들만 수북히 쌓여 있었지 입대하기 전날 아무도 몰래 편지를 모두 잘게 찢어 그대 집 담벼락에 깊이 묻고 다시는 그리워하지 않으리 나는 바삐 걸었네 황산벌 황사바람 속에서도 바래지 않던 추억 수시로 가시처럼 날카롭게 되살아나서 하루에도 몇 번씩 파고들던 아픔이여 그래도 세월은 가고 있었네 제대해서 돌아와 다시 편지를 쓰려는데 그대는 하늘나라 먼 길을 떠났다던가 보름달은 환하게 밝아 있고 편지를 잘게 찢어 묻은 그 자리 찔레꽃이 무더기로 핀 이유를 비로소 알아내고 혼자 울었지 (그림 : 한희원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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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수 - 살아간다는 것은시(詩)/이외수 2016. 2. 6. 10:33
이제야 마음을 다 비운 줄 알았더니 수양버들 머리 풀고 달려오는 초여름 아직도 초록색 피 한 방울로 남아 있는 그대 이름... 돌아보면 인생은 겨우 한나절... 아침에 복사꽃 눈부시던 사랑도 저녁에 놀빛으로 저물어 간다고... 그대는 오지 않았다... 사랑이 깊을수록 상처도 깊어 그리움 짙푸른 여름 한나절 눈부시게 표백되는 시간을 가로질러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음악으로 멀어지는 강물소리... 허송세월 발목 잡는 세속에 등 돌리고 세필에 맑은 먹물 가느다란 선 하나로 산을 그렸다 이런 날 그대는 어찌 지내시는가... (그림 : 이영철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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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수 - 설야시(詩)/이외수 2015. 12. 1. 12:36
사람들은 믿지 않으리 내가 홀로 깊은 밤에 시를 쓰며 눈이 내린다는 말 한마디 어디선가 나귀등에 몽상의 봇짐을 싣고 나그네 하나 떠나가는지 방울소리 들리는데 창을 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 함박눈만 쌓여라 숨죽인 새벽 두 시 생각나느니 그리운 이여 나는 무슨 이유로 전생의 어느 호젓한 길섶에 그대를 두고 떠나왔던가 오늘밤엔 기다리며 기다리며 간직해 둔 그대 말씀 자욱한 눈 송이로 내리는데 이제 사람들은 믿지 않으리 내가 홀로 깊은 밤에 시를 쓰면 울고 싶다는 말 한마디 이미 세상은 내게서 등을 돌리고 살아온 한 생애가 부질없구나 하지만 이 시간 누구든 홀로 깨어있음으로 소중한 이여 보라 그대 외롭고 그립다던 나날 속에 저리도 자욱히 내리는 눈 아무도 걷지 않은 순백의 길 하나 그대 전생까지 닿아 있음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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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수 - 동전의 노래시(詩)/이외수 2014. 6. 24. 12:39
마침내 나 여기 버림받아 그늘진 담장 아래 떨어져 있다. 철사줄 한 토막이 될 지언정 돈이라는 이름으로는 태어나고 싶지 않았어라. 바람에 쓸려가는 휴지조각 하나도 한때는 자랑스러운 제 모습이 있었나니 부끄러워라 죄악의 이름 인간들의 가슴을 눈 멀게 하네. 하지만 위안컨대 나는 겨우 동전 한 닢 차라리 인간에게 버림받는 고마움이여 녹슬어가는 이 시간이 더욱 평화로워라. 어느날 철모르는 아이 하나 나를 주워 잘 닦아 가지고 놀다가 무심코 심심해져 멀리멀리 내던지면 그날밤 그 아이 곤히 잠든 방 창문 가득 별들이 총총하고 나는 그 중에 가장 가까이서 빛나는 별이 되고 싶어라. (그림 : 김경렬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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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수 - 모춘일기(暮春日記)시(詩)/이외수 2014. 6. 24. 12:20
사나흘 범람하는 황사바람 봄날은 저물어 이승길도 깊어라 아무리 하찮은 풀꽃이라도 그리움 한 모금은 간직되어 있나니 한나절 독약 같은 사랑으로 각혈하면서 복사꽃 속절없이 지는구나 초저녁 산자락에 고여드는 어스름 거기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름으로 눈시울 적시며 돋아나는 불빛이여 못다한 말들은 못다한 말들끼리 소리 죽여 흐르는 강물 가득히 물비늘로 뒤척이다 스러지는데 보아라 수양버들 머리풀고 바다로 간다 전생에도 연두빛 물오르는 그리움 몸살나는 이름으로 흔들리면서 (그림 : 강만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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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수 - 봄밤의 회상시(詩)/이외수 2014. 6. 6. 12:54
밤 새도록 산문시 같은 빗소리를 한 페이지씩 넘기다가 새벽녘에 문득 봄이 떠나가고 있음을 깨달았네 내 생애 언제 한번 꿀벌들 날개짓소리 어지러운 햇빛 아래서 함박웃음 가득 베어물고 기념사진 한 장이라도 찍어 본 적이 있었던가 돌이켜 보면 내 인생의 풍경들은 언제나 흐림 젊은날 만개한 벚꽃같이 눈부시던 사랑도 끝내는 종식되고 말았네 모든 기다림 끝에 푸르른 산들이 허물어지고 온 세상을 절망으로 범람하는 황사바람 그래도 나는 언제나 펄럭거리고 있었네 이제는 이마 위로 탄식처럼 깊어지는 주름살 한 사발 막걸리에도 휘청거리는 내리막 어허,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네 별로 기대할 추억조차 없는 나날 속에서 올해도 속절없이 봄은 떠나가는데 무슨 이유로 아직도 나는 밤 새도록 혼자 펄럭거리고 있는지를 (그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