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곽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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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 - 낡은 컬러사진시(詩)/곽재구 2021. 8. 25. 09:58
우리 엄마 수국색 포플린 치마 입고 수국색 양산 아래 웃고 있네 수국색 바람이 치마 주름에 볼 비비네 지난밤이었네 은하수 속을 스쳐가던 행성 하나 엄마!라고 부르는 소릴 들었지 부드럽게 펄럭이는 수국색 치마주름에 대고 나도 엄마!라고 불러보네 잠이 들어 엄마가 사는 세상에 찾아가면 엄마의 사진 한장 엄마가 아침에 일어나 기도하는 창가에 놓아둘 것이네 엄마 내가 왔어요! 라고 말하는 소리 듣지 못하고 엄마는 가만히 사진을 바라보다가 가슴에 꼬옥 껴안겠지요 (그림 : 설종보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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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 - 좋은 일시(詩)/곽재구 2021. 8. 19. 09:22
익은 꽃이 바람에 날리며 이리저리 세상 주유하는 모습 바라보는 것은 좋은 일 어린 물고기들이 꽃잎 하나 물고 상류로 상류로 거슬러올라가는 모습 바라보는 것도 좋은 일 유모차 안에 잠든 아기 담요 위에 그려진 하얀 구름과 딸기들 곁에 소월과 지용과 동주와 백석이 찾아와 서로 다른 자장가를 부르려 다두다 아기의 잠을 깨우는 것은 좋은 일 눈 뜬 아기가 흩날리는 꽃잎을 잡으려 손가락 열개를 펼치는 것은 좋은 일 아기의 손가락 사이에 하늘의 마을이 있어 꽃잎들이 집들의 푸른 창과 지붕에 수북수북 쌓이고 오래전 당신이 쫓다 놓친 신비한 무지개를 꿈인 듯 다시 쫓는 것은 좋은 일 (그림 : 이존립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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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 - 항구시(詩)/곽재구 2020. 4. 18. 08:33
- 용악에게 연안 통발 어선들 다닥다닥 붙은 선창 길 눈이 나려 배들의 얼굴이 하얗다 눈송이 참 곱누나 뱃사람들 떠들썩하게 웃으며 다찌노미집 연탄 화덕 곁으로 모이고 술청 아낙은 다시마 초고추장에 청어 과메기를 굽는다 사이다 컵에 소주 한 잔 마시고 적산가옥 늘어선 선창 골목길 걷다 낡은 도장가게 하나를 만났다 첫눈 오는 날 목도장에 이름 새기는 것은 서럽고 안쓰러운 일 도장집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얼굴 발그레한 처자가 아기 젖을 물리다 나를 보았다 나는 조금 민망하여 고개를 돌리고 도장 하나 팝세 라고 말했는데 아낙 또한 북관 사투리로 나그네 이름이 뭐수까? 묻는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며 농담으로 이용악이라 말했는데 아낙이 내게 시를 쓰남? 묻는 것이었다 이용악을 아는가? 물으니 「하나씩의 별」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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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 - 화지시(詩)/곽재구 2019. 6. 18. 08:44
1 누런 러닝셔츠 빨간 고쟁이 빨래 줄에서 산바람 기다려요 업어줘 펄럭 목 늘어진 러닝셔츠가 고쟁이를 감싸요 2 열아홉 우리 할매 서른 셋 조남풍씨 등에 업혀 월등 산골마을 왔지요 원추리 꽃 환하게 핀 산 능선 할머니 숨겨 놓고 첫 입맞춤 달게 쏟았지요 원추리 꽃냄새보다 숨 냄새 더 좋았지요 새 각시 업고 전쟁 없는 흰 구름 사는 산골 마을 들어갔지요 화지 : 전남 순천군 월등면의 산골마을. 히말라야 계곡 닮은 산마을에 봄이면 매화와 복숭아꽃 지천으로 핀다.(곽재구 시인) (그림 : 이양원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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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 - 기차는 좀 더 느리게 달려야 한다시(詩)/곽재구 2019. 6. 18. 08:41
어릴 적엔 강 건너 산비탈 마을 기차가 지나갈 때 손을 흔들었지 창밖으로 모자를 흔들던 이가 바람에 모자를 놓쳤을 때 보기 좋았지 어른이 되어 기차를 타게 되면 창밖으로 모자를 흔들고 싶었지 강 건너 앵두꽃 핀 마을 아이들이 손을 흔들면 창밖으로 하얀 모자를 흔들다 명주바람에 놓아주고 싶었지 모자를 열 개쯤 준비해 강마을의 아이가 손을 흔들 때 하나씩 바람에 날리는 거야 Ktx는 시속 300km로 달리지 손을 흔드는 아이도 없지 기차는 좀 느리게 달려야 해 사람은 좀 느리게 살아야 해 미친 듯 허겁지겁 사는 거 싫어 기차 안에 사람이 수백 명 타지 기차도 사람이야 더 느리게 달려야 해 시속 10km면 초원의 꽃들과 인사 나눌 수 있지 시속 20km 구간에선 초원의 소들이 무슨 풀을 먹는지 물을 수 있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