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생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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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생진 - 허여사(許女史)! 진도홍주3시(詩)/이생진 2020. 11. 9. 14:05
그녀는 홍주를 만들며 고양이와 산다 고양이는 새끼가 여섯 마리 추녀엔 포도넌출이 올라가며 고양이를 내려다보고 팔손이나무엔 콩새가 세 마리 홍주엔 꿀을 타야 취기가 누그러지고 안주엔 김이 좋다며 홍주를 권한다 가끔씩 눈물을 보이는 것은 사노라고 흘렸던 기억이 되살아나기 때문 그림을 하던 박화백이 홍주를 좋아했고 판화를 하던 오윤이가 이 방에서 3개월 홍주로 살았다며 홍주도 예술이라고 말하려다 수줍는다 가끔 자기 감정에 취해 울을 때 콩새도 팔손이 열매를 입에서 떨어뜨리며 울었다 오윤이 죽었을 때 홍주를 들고 상여를 따라갔다며 자기 장례식에 간 것처럼 울었다 나보고 이쪽 방에서 홍주랑 살라하는데 나는 멋쩍어서 머리를 흔들었다 (그림 : 박양예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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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생진 - 허여사(許女史)! 진도 홍주1시(詩)/이생진 2020. 11. 9. 14:02
허여사(許女史)! 나는 처음으로 여자 이름에 감탄부호를 달았다 허여사(許女史)! 그녀는 스물 세살 때 처음 술을 빚었고 나는 스물 세 살 때 처음 여자 옆에서 술을 마셨다 허여사(許女史)! 하고 내가 세 번째로 부르는 이름인데 그때마다 깜짝깜짝 놀랜다 그녀의 이름도 나의 이름도 이젠 쭈그러진 합죽인데 어딘지 모르게 팽팽한 데가 있다 그녀와 나는 초면이다 만약 그때 만났으면 이렇게 가까이서 홍주를 받아들 처지가 아닌데 오늘은 남매처럼 아주 가까이 술상을 마주하고 있다 앞마당에 날아온 콩새 한 마리 이상하다며 머리를 갸웃거린다 이상할 거 없다고 쫓아버리면 다시 날아와 갸웃거린다 (그림 : 박양예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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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생진 - 밤 바다와 그리움시(詩)/이생진 2016. 8. 8. 20:49
그대가 밤 바다로 자주 나가는 건 가슴속에 파도가 많은 때문이다 그대가 밤길을 걸으며 하늘을 보는 건 가슴속에 그리움이 많은 때문이다 이 밤에 어쩌자고 저 별은 내 가슴을 찌르는 걸까 그렇지 그도 내게 그리움이 있어 그렇겠지 하늘의 별이나 바다의 파도가 왜 삶을 흔들고 찔러 대는 것일까? 꽃이 피면 꽃, 잎이 지면 잎, 그 하나하나도 무의미하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과 서로 닿아서 주고받는 것이라니 놀랍기도 하다. '가슴속에 파도가 많은 때문'에 밤 바다에 자주 나가는 사람이 있고 별이 '가슴을 찌르는'것은 그리움이 있기 때문이란다. 바다가 가까이 없어도 파도 소리를 듣는 귀가 있고 하늘을 보지 않아도 별을 보는 눈이 있는 것이 시인이라고? 그 귀와 눈을 갖고 싶구나. (그림 : 백중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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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생진 - 허여사(許女史)! 진도 홍주 2시(詩)/이생진 2016. 5. 28. 23:06
그녀는 술을 빚을 줄도 알고 술을 권할 줄도 안다 홍주는 아무에게나 권하는 것이 아니라며 매서운 눈으로 날 쳐다본다. 지초(芝草)에서 흐른 진홍색 물이 보리누룩과 한 이불 속에 재워 빨갛게 물들었을 때 그때 사람을 만나야 진짜라며 또 한번 내 눈을 뚫어지게 본다. 그땐 사람이 주인이 아니라 술이 주인이란다. 그제야 술이 묻는다. 너는 술만큼 투명 하냐 너는 술만큼 진하냐 너는 술만큼 정직 하냐 이때 이 물음에 답하는 것은 내 얼굴빛 내 얼굴빛이 홍주 빛일 때 비로소 내게 홍주 마실 자격을 준다 진도홍주(珍島紅酒) : 지초의 뿌리를 넣고 빚은 전라남도 진도지방의 전통 술. 진도홍주는 쌀과 지초로 만드는데 지초 뿌리에서 우러나온 색소 때문에 붉은 빛깔을 띠어 홍주라고 불린다. 진도홍주는 1994년 12월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