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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사람이 외로운 사람을 찾는다 등대를 찾는 사람은 등대같이 외로운 사람이다 무인등대가 햇빛을 자급자족하듯 외로움을 자급자족한다 햇볕을 받아 햇볕으로 바위를 구워 먹고 밤새 햇볕을 노해내는 고독한 토악질 소풍 온 아이들이 제 이름을 써놓고 돌아간 후 등대가 더 쓸쓸해진 것을 그 애들은 모르고 있다 녹산 등대 : 전남 여수시 삼산면 서도리 장촌 마을. 거문도에서 가장 큰 서도의 북쪽 끄트머리에 위치한 무인등대 (그림 : 최정은 화백)
고갯배가 하나씩 돌아오자 마을 개가 짖고 그물을 다듬던 아낙네가 남편 따라 돌아갔다 포구에 빈 배만 남기고 석양도 물 언덕을 넘어갔다 나만 황혼으로 남아 있구나 내일을 기다리기엔 너무 이른데 포구처럼 내가 오그라들고 있다 (그림 : 이원진 화백)
사랑은 우리 둘만의 일 없었던 것으로 하자고 하면 없었던 것으로 돌아가는 일 적어도 남이 보기엔 없었던 것으로 없어지지만 우리 둘만의 좁은 속은 없었던 일로 돌아가지 않는 일 사랑은 우리 둘만의 일 겉으로 보기엔 없었던 것 같은데 없었던 일로 하기에는 너무나 있었던 일 (그림 : 한영수 화백)
물 따라 가다가 물이 돌아와서 나도 되돌아왔다 물만 혼자 가버린 것 같아서 창문부터 열어 봤는데 물은 그곳에 있고 배만 가 버렸다 물 따라 간 배가 돌아오려나 삼십 일이고 일생이고 기다렸다 나도 물 따라 가 볼까 했는데 물은 늘 그곳에 있고 배만 오지 않았다 물은 이별을 나르고 저만 돌아오는 것 물은 세월만 젓고 저만 남아 있는 것 언젠가는 나도 저 물 위로 가고 돌아 오지 않을 거다 (그림 : 이황 화백)
눈 덮인 그리움이 발을 굴러도 나오지 않는다 그리움은 철부지처럼 따뜻하리라 눈에 덮혀 따뜻한 김에 날 몰라보면 어쩌지 얼음 밑으로 흐르는 계곡물 따라 그대로 내려가면 어쩌지 '봄엔 꼭 만날 수 있게 해다오' 속으로 빈다 꽃을 들고 나오겠지 겨울은 봄을 기다리기 위한 계절 꽃을 머리에 꽂고 나오겠지 (그림 : 안기호 화백)
네 몸에서 가을 잎이 떨어지고 옷에 묻은 세월이 떨어져나갈 때까지 나는 네 옆을 떠나지 않았다 네 눈이 호수로 떠있고 별들이 그 호수에 가라앉는 밤에도 나는 네 옆을 떠나지 않았다 호수에 내려온 별들이 옷을 갈아입고 노란 창포로 떠올랐을 때에도 나는 네 옆을 떠나지 않았다 노란 창포가 시들어 누워버린 후에도 나는 사공이 되어 시든 창포 사이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림 : 이황 화백)
이제 서서히 가면서 갈 데로 가자 내가 가는 데는 아직도 두 가지 하나는 가면서 내가 보이고 하나는 가면서 내가 안 보이는 곳 나는 그렇게 두 가지로 가고 있다 이젠 하나만 남았으니 울지 마라 내가 가면서 내가 안 보이는 하나 너는 보이지 않는 나와 무슨 상관이냐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울지 마라 내 고독엔 귀가 없으니 귀에 대고 울지 마라 (그림 : 석창우 화백)
나뭇잎은 시달려야 윤이 난다 비 바람 눈 안개 파도 우박 서리 햇볕 그 중에 제일 성가시게 구는 것은 바람 그러나 동백꽃나무는 그렇게 시달려야 고독이 풀린다 이파리에 윤기 도는 살찐 빛은 바람이 만져 준 자국이다 동백꽃은 그래서 아름답다 오늘같이 바람 부는 날 동백꽃은 혼자서 희희낙락하다 시달리며 살아남은 것들은 눈부시게 아름답다 (그림 : 백중기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