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황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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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규 - 봄 나이테시(詩)/황동규 2023. 4. 14. 01:08
C자로 잘룩해진 해안선 허리 잎이며 꽃이며 물결로 설렌다. 노랑나비 한 쌍 팔랑이며 유채밭을 건너고 밝은 잿빛 새 두 마리 앞 덤불에서 뜬금없이 자리 뜬다. 바닷물은 들락날락하며 땅의 맛을 보고 있다. 그냥 흙 맛일까? 바로 뒤통수에서 물결들이 배꼽춤 추고 있는데. ' 섬들이 막 헛소리를 하는군. 어, 엇박자도 어울리네 물결들이 발가벗었어. 바투 만지네, 동그란 섬들의 엉덩이를.' 가까이서 누군가 놀란 듯 속삭이고 바다가 허파 가득 부풀렸다 긴 숨을 내뿜는다. 짐승처럼 사방에서 다가오는 푸른 언덕들 나비들 새들 바람자락이들이 여기 날고 저기 뛰어내린다. 누군가 중얼댄다. '나이테들이 터지네.' 그래, 그냥은 못 살겠다고 몸속에서 몸들이 터지고 있다. (그림 : 이현열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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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규 - 화양계곡의 아침시(詩)/황동규 2021. 4. 28. 19:26
지난밤 여러 사람과 꽤 마셔댔으니 말빛 많이 졌겠지. 자갈들이 서로 살갗 살살 간질이는 새벽 물소리 잠이 종잇장처럼 가벼워진다. 펜션 빠져나와 물가에 선다. 이게 몇 세월만인가? 여기저기서 물안개들 피어올라 안개구름 되어 산과 산 사이로 올라가 몸을 감춘다. 골짜기들 품이 생각보다 넉넉하군. 바로 눈 앞 물 위에서 이리저리 달리는 저놈은? 아 소금쟁이, 내 정신보다 더 가볍고 빠르네. 군더더기가 없다. 산새 하나가 풍경(風景) 밖으로 나와 이리 와유 요리 와유 하며 뛰어다닌다. 이런 곳이라면 진 빛 못다 갚고 세상 뜨더라도 가볍고 밝은 잠 하나쯤 데불고 갈 수 있을 거다. (그림 : 홍인순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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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규 - 겨울을 향하여시(詩)/황동규 2020. 12. 28. 09:22
저 능선 너머까지 겨울이 왔다고 주모가 안주 뒤집던 쇠젓가락을 들어 가리켰다. 폭설이 허리까지 내리고 먹을 것 없는 멧새들 노루들이 골짜기에서 마을 어귀로 내려왔다고, 이곳에도 아침이면 아기 핏줄처럼 흐르는 개울에 얼음이 서걱대기 시작했다고. 알 든 양미리구이 안주로 조껍데기술을 마시며 생각한다. 내 핏줄에도 얼음이 서걱대지는 않나? 텔레비전 켜논 채 깜빡깜빡 조는 초저녁에 잠 깨어 손가락 관절 하나 꼼짝하기 싫은 새벽에 그리고 이 술병, 마저 비울까 말까 저울질하는 바로 지금! 생각을 조금 흔든다. 그래 뾰족한 얼음 조각들이 낡은 혈관 녹 긁으며 흐르면 시원치 않겠나? 골짜기 가득 눈꽃이 이 세상 것 같지 않게 피어 보여줄 게 있다고 아슴아슴 눈짓하고 있는 설경 속으로 몸 여기저기서 수정구슬 쟁그랑쟁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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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규 - 또다시 겨울 문턱에서시(詩)/황동규 2020. 11. 29. 10:26
대놓고 색기 부리던 단풍 땅에 내려 흙빛 되었다. 개울에 들어간 녀석들은 찬 물빛이 되었다. 더 이상 뜨거운 눈물이 없어도 될 것 같다. 눈 내리기 직전 단색의 하늘, 잎을 벗어버린 나무들, 곡식 거둬들인 빈 들판, 마음보다 몸쪽이 먼저 속을 비우는구나. 산책길에서는 서리꽃 정교한 수정 조각들이 저녁 잡목 숲을 훤하게 만들고 있겠지. 이제 곧 이름 아는 새들이 눈의 흰 살결 속을 날 것이다. 이 세상에 눈물 보다 밝은 것이 더러 남아 있어야 마감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견딜 만한 한 생애가 그려 지지 않겠는가? (그림 : 신재흥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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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규 - 살다가 어쩌다시(詩)/황동규 2017. 6. 21. 11:15
천천히 말끝 흐리며 두팔로 어이없다는 몸짓까지 지어 꼿꼿이 앉아 같이 차 마시던 사람 고개 끄덕이게 한 날 말들이 정신없이 뻥 튀겨진 날 썰물이 조개 숨은 곳 게의 집 문턱까지 모두 다 드러내는 강화 개펄로 달려간다. 구름 떠 있고 물결은 저만치서 혼자 치고 있다. 하늘과 바다와 개펄이 손을 놓고 있는 곳 신발과 양말 벗어들고 맨발로 걷는다. 배 하나 천천히 다가오다 그냥 지나친다. 누군가 속에서 앓는 소리를 낸다. 앓는 소리는 아픔의 거품, 게처럼 거품을 뱉어내야 할까! 갈매기 수를 센다. 헷갈려 다시 센다. 바다가 몸을 한 번 뒤척인다. 아파하는 구름은 없다. 펄 한가운데 하릴없이 서 있는 사람이 수상한지 게 한 마리 가다 말고 긴 눈 세워 눈알들을 굴린다. 소라 껍질을 덮어쓴 그보다 작은 게는 바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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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규 - 마음 어두운 밤을 위하여시(詩)/황동규 2016. 3. 16. 00:49
세상 사는 일, 봄비 촉촉이 내리는 꽃밭이기도 하고 피톤치드 힘차게 내뿜는 여름 숲이기도 하지만 모르는 새 밝아지는 단풍 길 나무들이 따뜻이 솜옷 껴입는 설경이기도 하지만 간판 네온사인 앞쪽 반 토막만 켜 있는 눈 내리는 폐광촌의 술집이기도 하다. 방 한쪽을 밝히는 형광등 불빛 아래 도토리묵 한 접시와 반쯤 빈 소주병 그리고 술잔 하나 달랑 놓고 앉아 있는 사내, 창밖에 눈 내리는 기척 그 너머론 신경 쓰지 않는다. 눈바람에 꼬리가 언 채 들려오는 밤기차 소리, 영월로 나갈 차인가 아니면 이 거리에 코 박고 잘 차인가, 이래도 좋고 저래도 그만인 소리엔 마음을 얹지 않는다. 들짐승이 달려와 등 비비대듯 문짝 덜컹덜컹 흔들던 눈바람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지고 가까이서 뉘 집 갠가 혼자 컹컹 짖다 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