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황동규
-
황동규 - 북촌시(詩)/황동규 2016. 1. 5. 13:45
언젠가 때늦은 순례길에 오르면 북촌에 가리. 안국역 3번 출구로 나와 삼청공원 쪽으로 천천히 걸어 올라가 높은 석축 밑을 파고 금박 글씨로 거창하게 주차장 지은 집 작은 숲 하나를 온전히 울안에 들여논 대가(大家)들을 지나 차가 드나들 수 없는 골목으로 빠져들리. 그 언젠가 들어가 기웃거린 골목이면 어떠리. 담 밖에 한 뼘 남은 흙에도 꽃을 심는 곳, 국화들이 환하다. 한 집 대문이 열려 있어 들여다보면 조그만 마당에 나무판자 둘러 겨울 동파를 막은 환갑 훌쩍 넘겼을 수도가 박혀 있고 코스모스와 구절초 모여 선 조그만 꽃밭에 물을 주는지 알맞은 길이로 고무호스가 달려 있다. 닳고 닳은 문지방 너머로 나이든 삽살이 하나가 다가와 '어떻게 오셨습니까?' 목에 줄만 없었다면 머리 쓰다듬어주고 들어가 주인과 인..
-
황동규 - 겨울 항구(港口)에서시(詩)/황동규 2015. 12. 18. 19:22
황홀하더라, 눈비 내려 동백꽃 헛 핀 앞섬도 다섯 낮 다섯 밤을 방황한 하숙집의 무적(霧笛)도 하루종일 밀고 밀어 밤마다 조금씩 새는 헛된 꿈 장지 하나 사이하고 하숙집 아주머니의 잠꼬대 “이젠 정말 아무 뜻도 없십니더” 그네가 조심히 어시장(魚市場)에 가는 새벽녘의 행복 방파제에 걸린 새벽 달빛 물 위에 오래 뛰어 오르는 순색(純色) 고기들 소규모의 일출(日出) 갯벌 폐선(廢船) 위에 걸터앉아 보는 수리(修理) 안된 침묵(沈默), 사이사이의 수심가(愁心歌) “결사적인 행복이 없는 즐거움을” 저녁이면 혼자 마주 보노니 바다 위에 떠 있는 아름답고 헛된 구름 기둥을. 무적(霧笛 명사) : 안개가 끼었을 때에 선박이 충돌하는 따위를 막기 위하여 등대나 배에서 울리는 고동. (그림 : 안기호 화백)
-
황동규 - 은행잎을 노래하다시(詩)/황동규 2015. 11. 8. 13:32
그래도 열 손가락으로 헷갈리지 않고 만나고 싶은 사람 세다 세상 뜬다는 것 얼마나 자지러진 휘모리인가. 갓 뜬 노랑 은행잎이 사람과 차에 밟히기 전 바람 속 어디론가 뵈지 않는 곳으로 간다는 것! 갑자기 환해진 가을 하늘 철근들 비죽비죽 구부정하게 서 있는 정신의 신경과 신경 사이로 온통 들이비쳐 잠시 아무것도 부끄럽지 않고 길 건너려다 말고 벗은 몸처럼 서 있어도 홀가분할 때, 땅에 닿으려다 문득 노랑나비로 날아올라 막 헤어진 가지를 되붙들까 머뭇대다 머뭇대다 손 털고 날아가는 저 환한 휘모리, 저 노래! 휘모리 : 판소리 및 산조(散調) 장단의 한가지. 가장 빠른 속도로 처음부터 급히 휘몰아가는 장단. (그림 : 김기홍 화백)
-
황동규 - 이 환장하게 환한 가을날시(詩)/황동규 2015. 9. 2. 17:52
이 환장하게 환한 가을날 화왕산 억새들은 환한 중에도 환한 소리로 서걱대고 있으리. 온몸으로 서걱대다 저도 모르게 속까지 다 꺼내놓고 다 같이 귀 가늘게 멀어 서걱대고 있으리. 걷다 보면 낮달이 계속 뒤따라오고 마른 개울 언저리에 허투루 핀 꽃 없고 새소리 하나도 묻어 있지 않은 바람 소리 누군가 억새 속에서 환하게 웃는다. 내려가다 처음 만나는 집에 들러 물 한 잔 청해 달게 마시고 한 번 달게 웃고 금세 바투 몰려드는 무적霧笛 같은 어스름 속 무서리 깔리는 산길을 마른 바위에 물 구르듯 내려가리. (그림 : 장용길 화백)
-
황동규 - 마른 국화 몇 잎시(詩)/황동규 2014. 12. 19. 20:46
다 가버리고, 남았구나 손바닥에 오른 마른 국화 몇 잎. 짧은 가을이 갔다. 떨어진 나뭇잎들 땅에 몸 문지르다 가고 흰머리 날리며 언덕까지 따라오던 억새들도 갔다. 그대도 가고 그대 있던 자리에 곧 지워질 가벼운 나비 날갯짓처럼 마른 국화꽃 내음이 남았다. 우리 체온이 어디론가 가지 못하고 끝물 안개처럼 떠도는 골목길에 또 잘못 들어섰다든가 술집 주모 목소리가 정말 편안해 저녁 비 흩뿌리는 도시의 얼굴 그래도 참을 만하다든가 그대에게 무언가 새로 알릴 거리 생기면 나비 날갯짓 같은 이 내음을 통해 하겠네. 나비 날갯짓이 지구 반대편에 가서 폭풍을 낳는다고도 하지만 가을이 아직 남아 있다고 생각지는 마시게. (그림 : 안모경 화백)
-
황동규 - 물소리시(詩)/황동규 2014. 9. 5. 17:19
버스 타고 가다 방파제만 바다 위에 덩그러니 떠 있는 조그만 어촌에서 슬쩍 내렸다. 바다로 나가는 길은 대개 싱겁게 시작되지만 추억이 어수선했던가, 길머리를 찾기 위해 잠시 두리번댔다. 삼십 년쯤 됐을까, 무작정 바닷가를 거닐다 만난 술집 튕겨진 문 틈서리에 새들이 둥지 튼 낡은 해신당 아래 있었다. 저쯤이었나? 나무판자에 유리도 없이 뚫어논 사각(四角) 창에 섬 하나 떠 있고 섬 뒤로 짧고 분명했던 수평선과 식힌 소주 생선 맨살과 주모의 낮은 말소리 그리고 아 물소리가 좋았다. 바다의 감각이 몸부림치며 바위에 몸을 던져 몸부림을 터는, 터는 듯 다시 몸을 던지는 소리. 다른 아무것도 안에 들이지 않고 저물던 바다의 실루엣 원근 따로 없이 모두 한가지로 저물었다. 바로 이쯤이었지? 술집 사라지고 해신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