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오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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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영 - 사막시(詩)/오세영 2022. 1. 21. 13:29
사막은 저희끼리 산다 하더라. 바람에 쓸려간 꽃잎들이 바람에 증발한 눈물들이 바람에 바래버린 내 청춘의 별빛들이... ... 사막에서는, 이 지상에서 이미 사라진 것들이 꿈꾸듯 산다 하더라. 돌아서던 네게 마지막으로 건네던 한 마디 말이, 바람 앞에선 운명의 그 슬픈 그림자가 흘러흘러 모여든 사막은 바람들의 고향 내 죽으면 잃어버린 첫사랑을 찾아 사막으로 가리라. 기우뚱 기우뚱 낙타 등에 희미한 등불 하나 달고. 터벅터벅 낙타 목에 가냘픈 방울 하나 달고 (그림 : 나옥자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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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영 - 그리운 이 그리워시(詩)/오세영 2021. 1. 14. 10:42
그리운 이 그리워 마음 둘 곳 없는 봄날엔 홀로 어디론가 떠나버리자 사람들은 행선지가 확실한 티켓을 들고 부지런히 역구를 빠져나가고 또 들어오고 이별과 만남의 격정으로 눈물 짓는데 방금 도착한 저 열차는 먼 남쪽 푸른 바닷가에서 온 완행 실어온 동백 꽃잎들을 축제처럼 역두에 뿌리고 떠난다 나도 과거로 가는 차표를 끊고 저 열차를 타면 어제의 어제를 달려서 잃어버린 사랑을 만날 수 있을까 그리운 이 그리워 문득 타보는 완행열차 그 차창에 어리는 봄날의 우수 (그림 : 설종보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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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영 - 고향시(詩)/오세영 2020. 12. 6. 15:16
고향은 누군가가 기다려지는 얕으막한 산등성이 있어 고향이다. 그 산등성 너머 흰 연기를 토하고 달리던 하오 두시 완행열차의 기적이 있어 고향이다. 기적 끊긴 적막한 겨울 오후, 긴 날개의 그림자를 땅위에 드리우며 하루 종일 하늘을 맴돌다가 사라지던 소리개가 있어 고향이다. 소리개를 쫓아 불현듯 줄을 끊고 산 너머로 달아나버린 연, 그 연을 찾으러 함부러 뛰어다니던 언덕이 있어 고향이다. 머리 희끗희끗 한번 떠난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는 길은 멀었다. 먼 항구의 불빛과 낯선 거리의 술집과 붉은 벽돌담과 교회당의 뒤뜰 을 걸어서 그 언덕에 다시 섰는데 왜 이제는 이다지도 기다릴 사람이 없는가 고향은 누군가를 기다릴 수 있어 고향이다. (그림 : 김지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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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영 - 이별이 가슴아픈 까닭시(詩)/오세영 2020. 7. 31. 17:48
이별이 슬픈 건 헤어짐의 순간이 아닌 그 뒤에 찾아올 혼자만의 시간 때문이다. 이별이 두려운 건 영영 남이 된다는 것이 아닌 그 너머에 깃든 그 사람의 여운 때문이다. 이별이 괴로운 건 한사람을 볼 수 없음이 아닌 온통 하나뿐인 그 사람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이별이 참기 어려운 건 한 사람을 그리워해야 함이 아닌 한번도 해보지 않았던 그 사람을 지워야 함 때문이다. 이별이 아쉬운 건 한 사람을 곁에 둘 수 없음이 아닌 다시는 그 사람을 볼 수 없음 때문이다. 이별이 후회스런운 건 한 사람을 떠나 보내서가 아닌 그 사람을 너무도 사랑했음 때문이다. 이별이 가슴아픈 건 사랑이 깨져버림이 아닌 한 사람을 두고 두고 조금씩 잊어야 함 때문이다. (그림 : 노충현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