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고재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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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종 - 저녁바람의 노래시(詩)/고재종 2021. 2. 9. 09:22
바람이 쓰다듬는 저물녘의 노래는 시오리 장에 갔다가 뉘엿뉘엿 돌아오던 아버지의 두루마기 자락처럼 지극하네 불콰해진 강물, 반짝이는 고요를 깨며 누군가를 몰래 호출하는 뻐꾸기 이때쯤 바람은 수수밭 가를 내내 서성거렸지 늘 굽은 등을 보이며 숨어드는 쓸쓸한 꿈들과 짐짓 보람도 없이 저미는 시간의 갈기조차 가만가만 다독이던 바람의 노래 노을빛, 휘파람소리 차마 말할 수 없는 것들은 능선으로 굽이친다네 이제는 노래로도 모자라 노래도 버리고 너무 멀어져서 명치끝만 타는 사람의 길목 어둡지 않게 하나 둘 별들을 송출하는 분꽃 나팔들 내 늦은 귀가를 조율하던 어머니의 마루에서 오늘은 무엇을 넣고 빼서 처마 끝에 그리움의 풍경을 내다 걸까 (그림 : 고찬용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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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종 - 길에 관한 생각시(詩)/고재종 2019. 10. 23. 15:16
마음은 쫓기는 자처럼 화급하여도 우리는 늘 너무 늦게 깨닫는 것일까. 새벽에 일어나 흰 이슬 쓰고 있는 푸성귀밭에 서면 저만큼 버려두었던 희망의 낯짝이 새삼 고개 쳐드는 모습에 목울대가 치민다. 애초에 그 푸르름, 그 싱싱함으로 들끓었던 시절의 하루 하루는 투전판처럼 등등했지, 그 등등함 만큼 쿵쿵거리는 발길은 더 뜨거웠으니 어느 순간 텅 비어버린 좌중에 놀라, 이미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적당히 타협해버린 연인들처럼, 그렇게, 한번 그러쳐 든 길에서 남의 밭마저 망쳐온 것 같은 아픔은 깊다. 살다보면 정이 들겠지, 아니 엎어지든 채이든 가다보면 앞은 열리겠지, 애써 눈을 들어 먼산을 가늠해보고 또 마음을 다잡는 동안 세월의 머리털은 하얗게 쇠어갔으니, 욕망의 초록이 쭉쭉 뻗쳐오르던 억새풀 언덕에 마른 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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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종 - 의춘(宜春)시(詩)/고재종 2019. 1. 12. 22:38
밤도와 대숲에 튄 별 편편을 쪼았으니 되새 떼의 아침 비상은 찬란해야하지 않겠는가 늘 습기(習氣)밴 하품의 나날이라면 동백꽃 저 붉은 사자후는 약이 좀 되겠다 하루에 두 번 오가는 마을버스처럼 울음을 떠나보내고 기다림은 노래하는 강의 길목 벌써 낡은 갈대를 도발하는 버들바람은 저 남산 너설을 질러오는 송골 여파라지 그 갈기를 타고 휘파람을 불면 대울타리 아래 노란 수선화도 새뜻해지겠다 때론 오래된 풍조(風調)쯤으로 세상을 열면 홀로 끓인 냉이된장국에도 입맛이 선다 (그림 : 김기택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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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종 - 고요를 시청하다시(詩)/고재종 2018. 2. 13. 10:05
초록으로 쓸어놓은 마당을 낳은 고요는 새암가에 뭉실뭉실 수국 송이로 부푼다 날아갈 것 같은 감나무를 누르고 앉은 동박새가 딱 한 번 울어서 넓히는 고요의 면적, 감잎들은 유정무정을 죄다 토설하고 있다 작년에 담가둔 송순주 한 잔에 생각나는 건 이런 정오, 멸치국수를 말아 소반에 내놓던 어머니의 소박한 고요를 윤기 나게 닦은 마루에 꼿꼿이 앉아 들던 아버지의 묵묵한 고요, 초록의 군림이 점점 더해지는 마당, 담장의 덩굴장미가 내쏘는 향기는 고요의 심장을 붉은 진동으로 물들인다 사랑은 갔어도 가락은 남아, 그 몇 절을 안주 삼고 삼베올만치나 무수한 고요를 둘러치고 앉은 고금(孤衾)의 시골집 마루, 아무것도 새어나게 하지 않을 것 같은 고요가 초록 바람에 반짝반짝 누설해놓은 오월의 날 비린내 나서 더 은밀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