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고재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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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종 - 평정(平正)시(詩)/고재종 2017. 9. 11. 15:17
저무는 들녘, 써레질 뒤끝에 논을 고르는 사람이 있다. 그 흙이 아무리 부드러운들 흙굴헝 진창 속에서 흙굴헝 진창을 밀고 당기며 모낼 논을 고르는 사람이 있다 저 논 어느 한 곳인들 높낮으면 어린 모 한쪽은 썩어나고 한쪽은 바싹 말라붙으리니 온몸의 흙감탱이인들 마다하랴 석류빛 저녁놀이 씻어내고 엉머구리의 신명이 북돋우는 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저 외롭고 쓸쓸한 노역이여 그 모진 땀과 눈물로 하늘의 별톨인들 못 밝히랴만 저 세상 고르기의 마지막 순정의 높이가 아니라면 푸른 지평선인들 어찌 바라랴 쭉쭉쭉쭉, 머슴새 소를 몰듯 스스로를 몰아대며 논을 고르는 사람이 있어 보랏빛 이내가 덮는 들이 있고 마을은 모낼 꿈으로 뒤척이리니 (그림 : 김용옥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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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종 - 저 홀로 가는 봄날의 이야기시(詩)/고재종 2016. 1. 16. 09:22
"얼씨구, 긍께 지금 봄바람 나부렀구만잉!" 일곱 자식 죄다 서울 보내고 홀로 사는 홍도나무집 남원 할매 그 반백머리에 청명햇살 뒤집어쓴 채 나물 캐는 저 편을 향해, 봇도랑 치러 나오는 마흔두 살 노총각 석현이 흰 이빨 드러내며 이죽거립니다. "저런 오사럴 놈, 묵은 김치에 하도 물려서 나왔등만 뭔 소리다냐. 늙은이 놀리면 그 가운뎃다리가 실버들 되야 불 줄은 왜 몰러?" 검게 삭은 대바구니에 벌써 냉이, 달래, 쑥, 곰방부리 등 속을 수북이 캐 담은 남원할매도 아나 해보자는 듯 바구니를 쑤욱 내밀며 만만찮게 나옵니다. "아따 동네 새암은 말라붙어도 여자들 마음 하나는 언제나 스무 살 처녀 맘으로 산다는 것인디 뭘 그려. 아 저그 보리밭은 무단히 차오르간디?" "오매 오매 저 떡을 칠 놈 말뽄새 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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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종 - 강경(江景)시(詩)/고재종 2015. 8. 25. 12:32
황산나루 저녁노을, 구장터 욕보네집 주모의 눈물로 이렁였으리 위로 아래로 죄다 내주고는 푹 삭은 황산젓갈에 저민 소가지를 하고 투가리 같은 작자만 두엇이나 받던 주모 이글거리는 강물만큼이나 작두로도 못 자르는 그리움 같은 걸 덜어주면서도 덜어낸 만큼의 마투리를 채워주지 않는 황산나루 저녁놀은, 저편의 강둑 갈밭마저 죄 불지르고 검 기울어간다 마투리 : 곡식의 양을 섬이나 가마로 잴 때에, 한 섬이나 한 가마가 되지 못하고 남은 양. [비슷한 말] 말합. 황산나루 : 충청남도 논산시의 강경읍 황산리에 있는 황산 아래에 있던 금강변 나루터이다. 조선 시대까지는 전북 여산군에 속했다. 황산(黃山)과 황산포(黃山浦)가 있었기 때문에 황산 나루라는 이름이 나왔다고 한다. 『동국여지지』에 '강경도(江景渡)'라는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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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종 - 텅빈 충만시(詩)/고재종 2014. 7. 12. 00:34
이제 비울 것 다 비우고, 저 둔덕에 아직 꺾이지 못한 억새꽃만 하얗게 꽃사래치는 들판에 서면 왠일인지 눈시울은 자꾸만 젖는 것이다 지푸라기 덮인 논, 그 위에 내리는 늦가을 햇살은 한량없이 따사롭고 발걸음 저벅일 때마다 곧잘 마주치는 들국화 떨기는 거기 그렇게 눈 시리게 피어 이 땅이 흘린 땀의 정갈함을 자꾸만 되뇌이게 하는 것이다, 심지어 간간 목덜미를 선득거리게 하는 바람과 그 바람에 스적이는 마른 풀잎조차 저 갈색으로 무너지는 산들 더불어 내 마음 순하게 순하게 다스리고 이 고요의 은은함 속에서 무엇인가로 나를, 내 가슴을 그만 벅차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청청함을 딛고 정정함에 이르른 물빛 하늘조차도 한순간에 그윽해져서는 지난 여름 이 들판에서 벌어진 절망과 탄식과 아우성을 잠재우고 내 무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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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종 - 능금밭 앞을 서성이다시(詩)/고재종 2014. 7. 12. 00:28
내가 시방 어쩌려고 능금밭 앞에서 서성이며 내가 요렇듯이 바잡는 마음인 것은 저 가시 탱자울의 삼엄한 경비 탓이 아니다 내가 차마 두려운 건, 저 금단의 탱자울 너머 벌써 신신해진 앞강물소리와 벌써 쟁명해진 햇살을 먹고 이 봐라, 이 봐라, 입 딱! 벌게는 주렁거리며 빨갛게 볼을 붉히고 있을 능금알들의 황혼 어느해 가을 저곳에서 머리에 수건을 쓰고, 볼이 달아오를대로 올라선 그 능금알을 따는 처녀들과 그것을 한광주리씩 들어올리는 먹구리빛 팔뚝의 사내들을 훔쳐본 적이 있다 나는 아직도 저 능금밭에 들려거든 두근두근 숨을 죽이고, 콩당콩당 숨을 되살리며 개구멍을 뚫는 벌때추니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토록 익을대로 익은 빛깔이 그토록 견딜 수 없는 향기로 퍼지는 저 풍성한 축제를 누가 방자하게 바라볼 것인가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