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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재종
    시(詩)/고재종 2014. 7. 12. 01:02

     

     

     

    (1959년 5월 30일 ~ )전남 담양에서 태어나 담양농고를 졸업했다. 1984년 실천문학사의 신작시집 《시여 무기여》에 〈동구 밖 집 열 두 식구〉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1993년 제11회 신동엽창작기금을 받고, 1995년시집 《날랜 사랑》을 출간했다.

    1999년까지 고향에서 농사를 지었다. 생명이 시드는 퇴락의 공간으로 농촌의 황폐화 문제와 환경문제를 꼭꼭 짚어 가면서 참담한 삶속에서도 생명의 기미를 포착, 그것의 회복을 갈구하는 시편들을 선보이며 자연과 농촌의 충만한 아름다움을 노래해온 농민시인이다.[1]

    〈백련사 동백숲길〉로 2001년 제16회 소월시문학상을 받았다. 〈사랑, 그 봄 여름 가을 겨울〉이 2003년 농림부에서 주는 ‘농(農)사랑 시(詩)사랑’작품에 뽑혔다. 2009년부터 광주전남작가회의 회장을 맡고 있다.

     

     

    고재종 시인(高在鍾, 1959년생)의 시는 전남 담양군 수북면 궁산리의 숲길과 들녘에서 생명력을 얻는다. ‘궁산리’는 지형이 활(弓)을 닮아 ‘궁산’이란 이름을 얻었지만 인근에서도 워낙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탓에 궁(窮)산으로도 불리었다고 한다. 이름처럼 궁산리는 초입에서부터 ‘깡촌’ 냄새가 물씬 풍긴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모두 농촌에 있다”고 말했던 시인의 고백은 고향에 대한 절실함과 애틋함이 마음 깊이 묻어 있음을 증언한다. 곧, 궁산리는 시인으로서 자신의 삶을 낳은 텃밭이기도 하면서 여전히 시인의 삶이 살아 숨 쉬는 공간이다. 고재종 시인이 40여 년을 마음에 담고 살아 왔다는 담양 궁산리, 그는 요즘 새로운 시의 텃밭을 일구며 이곳에 둥지를 틀고 혼자 지내고 있다. 벌써 5년째다. 아직 찬바람이 가시지 않은 3월 하순, 궁산리 시골집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시골집이 비게 되자 동네 분들이 들어오라고 권유해서 다시 살게 되었다고 했다. 가족들은 광주에 있고, 시골집을 리모델링하여 지금은 담양 문화원 일을 돌보며 혼자 지내고 있다. 빼곡하게 정돈된 책들과 깔끔한 주방도 놀라웠지만, 마당가에 피라미드 모형으로 잘 쌓아 둔 빈 술병을 보고는 감탄사를 연발할 정도였다. 혼자 지내면서 그는 요리, 독서, 시 창작, 음악 감상 등의 다양한 취미를 즐긴다. 완벽주의적인 성격이어서 깔끔하게 정리하는 오랜 습관이 몸에 남아 있다고 한다. 그 많은 책들 중에서도 한 번 꽂은 책들의 위치는 금방 찾을 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 술을 마시면서 이런 완벽주의가 깨졌다고 한다. 술로 인해 다른 세상으로 가는 출구를 찾은 것이다. 원래는 로고스(logos)적 성격이 강했으나 술만 마시면 제 안의 파토스(Pathos)가 분출한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마당가에 피라미드형으로 쌓아둔 빈 술병들이 유독 많아 보였다.

     

     

      그는 그동안 시를 많이 쓰지 않았음을 고백했다. 직장 다니면서는 시집을 안 내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 쓰는 일은 가난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들의 몫이라고 생각했을까? 돈의 맛과 지나친 욕망으로 시인이라는 이름을 사칭하는 것이 어딘지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괜히 시에 죄를 짓는 것은 아닌가 싶어 그는 담양 문화원에 근무하면서 시를 쓰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시를 쓰는 일 역시 오히려 자신과 고향에 기여하는 일임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책 다음으로 그의 집에는 차(茶)가 많았다. 혼자 지내며 차를 생활화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는 하루에 스무 잔 정도의 차를 마신다. 차를 마시며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창작을 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즐거움이다. 그리고 텃밭 관리를 한다. 마당의 텃밭에는 마늘이며, 상추며 고추 등이 시상(詩想)처럼 자라고 있다. 시골에는 이런 여유가 있어 좋지만, 그런 여유를 방해하는 건 외로움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런 외로움을 견디는 힘이 바로 외로움에 있다는 걸 알아서였을까? 외로울 때마다 그는 담양 출신으로서 지역에 봉사한다는 생각으로 이를 극복하며 산다. 담양의 정자문화를 정리하고 가사문학을 정리하는 작업도 그가 고향인 담양에 기여했다는 중요한 증거다.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고향집을 지키면서 사는 것이 의무인 듯 느껴졌다고 한다. 고향이니까 좋은 줄 알았는데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이 그 이유다. 도시는 자본과 욕망에 휘둘리는 곳으로 사방이 환락가이며, 죽음을 부르는 대신 활력이 있다. 하지만 시골이야말로 정말 죽음의 공간이란 생각이 든단다. 노인들은 대부분 휠체어를 타고 다니고, 저녁 8시 이후엔 거의 모든 집의 불빛들이 다 꺼지고 가로등만 켜져 있을 뿐 적막감에 휩싸인다. 그래서 시골은 더 죽음에 가까운 곳이라고 했다.

      결국 도시도, 시골도 글쟁이들이 살만한 곳은 못되는 것 같다. 은행나무, 대나무 등을 베어 버리고 이제 시골도 도시화되어 가는 것이 늘 안타깝다. 고재종 시인의 집 앞에도 대나무 숲이 사라지고 지금은 그 모습이 허허롭다. 이곳에도 새로운 건물이 들어설 것이라고 한다. 자본이 세계를 지배하는 곳에서는 어디든 죽음의 공간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 비판한 시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와중에도 어딘가 꿈꾸는 시가 있을 수 있다고 믿는다. 작가에겐 그 어디가 되었든 유토피아이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천국이란 곳은 없다. 그래서 문학이란 고전만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고재종 시인. 동양사상 노자, 장자, 불교서적이 책장 한 칸을 차지할 정도로 그는 불교의 교리를 통해 자신을 가꿔왔다. 최근엔 ?고문진보?를 다시 읽기도 했다. 불교는 원래 책을 벗어나는 것이며, 경전 밖에서 깨달음을 구하는 학문인데, 결국 일상의 수양이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일상을 벗어나서는 한 치의 구원도 없다는 생각에 일상에서 삶의 가치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욕심 부리지 않고 마음을 비우는 연습을 하며 살려고 노력한다며, 그래 보이지 않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불교의 선사상들이 외로움을 잊고 사는 감정들 속에 자리 잡으니 사는 것 같다고 했다.  

      화제를 바꿔 이제는 한때 ‘농민 시인’이라고 불리었던 것에 대한 생각을 여쭈어 보았다. 그는 더 이상 농촌 풍경을 대상으로 시를 쓰고 싶지 않다고 했다. 더 이상 사향화 되어 시를 쓰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어떤 시인은 ‘사향의 미학’이라고 하여 고향의 사향화에 대한 안타까움을 시로 썼다고 하는데, 결코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고 했다. 농촌에 살지도 않으면서 농촌을 그리는 시를 쓰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농촌에 죄를 짓는 일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다.

      첫 시집 ?바람 부는 숲속에 사랑은 머물고?에서부터 네 번째 시집 ?날랜 사랑?에 이르는 시편 속에 묻어나는 감각과 이미지들의 저작권은 거의 모두 궁산리에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로 그의 시의 뿌리는 고향에 닿아 있다. 한때 그는 궁산리 땅에 작은 몸을 모두 맡긴 농사꾼이자 시인이었다. 봄이면 논을 갈아 씨를 뿌리고, 논가에 덥수룩하게 돋은 풀을 베고, 털털거리는 경운기로 나락 가마니를 옮겨 나르는 일을 글로 옮기며, 그야말로 ‘농민 시인’으로 살았다. 고재종 시인의 말을 빌리면, “궁산리가 나를 통해 암담한 농촌의 현실을 시로 토해냈는지도 모른다.”고 했을 정도다. 고재종 시인이 농촌의 현실에 천착하게 된 데는 태생적인 원인이 깃들어 있다. 유년 시절 가난이 만들어낸 참혹한 현실을 잊기 위해 빠져든 독서는 여전히 지금도 외로움을 다스리기 위해 필요하다. 그의 글쓰기는 유년 시절에 읽은 다양한 책의 행간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하니 고재종 시인의 독서의 깊이를 짐작할 만하다.

     

     

    두 번째 취직시험에 떨어진 큰아들이

    차라리 농사나 짓겠다고 나서자

    프로야구 홈런 한 개 값만도 못한

    이 밑빠진 농사를 짓겠다고 나서다니

    안 된다 내 눈 흙 쓰기 전에는 못한다.

    정 하고 싶다면 내 농약 먹고 죽겠다고 외쳐

    끝내 과수원 팔아 큰아들 서울로 쫓은 지도자

                                                            -「역설」 부분.

     

     

      당시의 농촌은 비닐하우스와 과수원 재배의 성공으로 영농교육 때마다 강사로 초빙되어 이웃 군에까지 이름이 쟁쟁한 이상해 씨가 농사짓겠다는 자식의 등을 도시로 떠미는 역설이 당연하게 일어났던 공간이다. 그 참담한 역설을 깨야 하는 당위성 위에 고재종 시인의 시는 존재한다. 이렇게 고재종 시인에게 궁산리는 자신의 시적 경험이 살아 있는 공간이다. 제멋대로 뻗은 비포장도로가 드문드문 눈에 띄고, 온 마을을 뒤덮고 있는 대숲과 길을 구분 짓는 흙돌담의 시간들이 고재종 시인의 시를 지탱해 온 힘이었음을 환기한다.

     

     

    대밭이 운다

    서걱서걱 서걱이는 댓니파리가 울고

    마디마디 부르터버린 댓매듭이 울고

    더욱 도저하게는 땅 밑 댓뿌리까지 울어

    급기야는 냉기 뚝뚝 듣는 대밭 일대

     

     

    치운 바람 속 내가 아는 것은 다만

    댓침에 찔린 생살 한 땀이

    대밭 전체로 뒤채인다는 것이다 지금.

                                       - 「죽세공 풍경」 부분.

     

     

      댓침에 생살을 찔려가며 죽물을 만드는 일로 어려운 살림을 살아왔던 궁산리 사람들의 생활상을 그린 시다. 듣기 좋게 서걱이는 댓잎소리가 궁산리 사람들에게는 타는 속울음이었음을 비유한다. 고재종 시인에게 죽세공의 풍경은 현실에 발을 담그고 있는 자가 불합리한 세상에 던지는 울음 같은 것으로 보인 것이다. 고향 풍경을 아름답게 그려내기에는 농촌의 삶이 급박했다. 척박한 농촌 현실 속에서도 아름다운 서정이 있고, 그는 늘 이런 고향을 그리워 했다.

      그런데 지금 고재종 시인에게 고향은 지긋지긋한 동네가 되었다. 평생 가난의 굴레에 찌든 공간인 고향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이곳은 여전히 가난한 유년의 텃밭이다. 그런데 이번에 돌아온 고향은 고향 개념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고 스스로에게 주어진 환경을 받아들인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다르다. 어떤 시인은 고향을 생명의 근원이며 원형이라고 하지만 고재종 시인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옛 친구도 없고, 옛 풍경이 사라진 곳이 무엇이 고향이란 말인가? 옛 고향의 터전이 남아 있어야 진정한 고향인 것이다. 문명의 이기 속에서 옛것이 다 사라지고 없는 곳은 더 이상 고향이 아니다. 투기 대상으로서의 고향이라 더이상 고향 시를 쓰기 싫을 정도다.

      그래도 고재종 시인에게 ‘어머니’에 관한 시를 여쭤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를 잃고 나면 누구든 한 번쯤 시 안에서 어머니를 불러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재종 시인은 어머니에 관한 시를 쓰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어머니를 아직도 객관적으로 볼 수가 없어서 어머니에 관한 시를 쓰지 못했다는 것이 그 이유다. 격해진 감정 때문에 어머니 시를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대신 그는 「파한」 이라는 시를 이야기했다. 주막집 이야기로, 실제 경험에서 나온 시이다. 스스로 제 육친적인 시임을 밝힌 시다. 그러면서 인간존재에 대한 물음, 존재의 형식을 묻게 하는 시를 쓰고 싶다고 포부를 보였다. 단돈 오천 원에 큰대접이 성립되는 것이 오늘날의 농촌이다. 시가 간직한 ‘아름다운 파안’의 뒷맛이 씁쓸하게 느껴진다.

     

     

    마을 주막에 나가서

    단돈 오천 원 내놓으니

    소주 세 병에

    두부찌개 한 냄비

     

     

    쭈그렁 노인들 다섯이

    그것 나눠 자시고

    모두들 볼그족족한 얼굴로

     

     

    허허허

    허허허

    큰 대접 받았네그려!

                                           - 「파안」 전문

     

     

      그는 아픈 아들 때문에 도대체 인간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카프카, 샤르트르, 카뮈 등을 읽으며 실존주의에 관심을 가졌다. 또한 ?민중신학?에서 ‘민중’을 처음 접했다고 한다. 1980년대도 민중의 이데올로기가 횡행했지만, 자신은 민중시를 쓴 것이 아니고 농민이니까 농민시를 쓴 것이다. 시는 자신이 살아낸 분량만큼만 쓴다. 시인으로서의 오랜 경력에도 불구하고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오리무중이라고 했다. 시를 살아야 시를 쓴다고 했던가. 시인은 시답게 살아야 시를 쓸 수 있다. 1980년대는 시와 삶이 일치했어야 했지만, 요즘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시와 삶이 일치한다는 것은 실로 무서운 일이기도 하다.

      이와 연장선상에서 후배시인들에게 하는 마지막 멘트를 부탁드렸다. 남도 사람들이 되도록 이데올로기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학인들은 자유로워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시인 김수영이 언급했던 ‘자유정신’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남도의 시인들은 이데올로기에 아직도 사로잡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한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야 함을 재차 강조했다. 공자의 말에 시로써 임금에게 충성하고 시로써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말이 있다. 시로써 나라와 민중 문제를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부모 뿐 아니라 주변 삶에 애환을 모드 담아야 한다. 시인이라면 의롭지 않은 일에도 분노할 수 있어야 한다. 시인이라면 모든 존재에 대해 노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시인은 늘 부지런해야 하는 것이다.

      시는 다양한 가운데 보편성을 발견해야 한다. 그런데 광주 전남 시인들은 너무 존재의 실존 문제에 정신을 투여하지 않는 것 같다. 소설가 이승우 선생이 유일하게 그것을 하고 있는 듯 보인다고 했다.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자유롭게 하고픈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시가 당위성을 가지면 안 된다. 1980년대는 시대구조가 어쩔 수 없었으니까 시가 당위성을 가졌었지만, 이제는 변화해야 한다. 변화하지 않는 건 죽는 것이다. 오로지 변한다는 사실만이 변하지 않는다.

      고재종 시인은 앞으로 실존에 부딪힌 문제를 시로 쓰고 싶다고 했다. 인간의 죽음 문제, 부조리의 문제를 비판하는 시를. 아마도 앞으로 출간될 제 7시집에는 인간 실존의 문제에서 비롯된 거대한 고독이 담겨 있을 것이라고 했다. 시집을 내지 않은지 올 해로 9년째, 이 긴 공백을 깨고 어서 빨리 그가 말한 거대한 고독의 시집이 될 제 7시집을 다른 독자들과 함께 기다려 보기로 한다. “전교생을 다 들이고도 남는”다는 담양 한재초등학교 교실, 그 교정의 느티나무를 기어올라 “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저 외롭고 쓸쓸한 노역”(「평정(平正)」)의 현장을 바라보았던 시인의 눈이 이제는 자기 내부로 향하고 있을 것이다. - 이송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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