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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종 - 저 홀로 가는 봄날의 이야기시(詩)/고재종 2016. 1. 16. 09:22
"얼씨구, 긍께 지금 봄바람 나부렀구만잉!"
일곱 자식 죄다 서울 보내고 홀로 사는 홍도나무집 남원 할매
그 반백머리에 청명햇살 뒤집어쓴 채 나물 캐는 저 편을 향해,
봇도랑 치러 나오는 마흔두 살 노총각 석현이 흰 이빨 드러내며 이죽거립니다.
"저런 오사럴 놈, 묵은 김치에 하도 물려서 나왔등만 뭔 소리다냐.
늙은이 놀리면 그 가운뎃다리가 실버들 되야 불 줄은 왜 몰러?"
검게 삭은 대바구니에 벌써 냉이, 달래, 쑥, 곰방부리 등 속을 수북이 캐 담은 남원할매도
아나 해보자는 듯 바구니를 쑤욱 내밀며 만만찮게 나옵니다.
"아따 동네 새암은 말라붙어도 여자들 마음 하나는
언제나 스무 살 처녀 맘으로 산다는 것인디 뭘 그려.
아 저그 보리밭은 무단히 차오르간디?"
"오매 오매 저 떡을 칠 놈 말뽄새 보소. 그려 그려. 저그 남원장 노루장화라도 좋응께요
꽃 피고 새 우는 날, 꽃나부춤 훨훨 춤서 몸 한번 후끈 풀었으면 나도 원이 없겄다.
헌디 요런 호시절 다 까묵고 니 놈은 언제 상투 틀테여?"
"아이고, 얘기가 고로코롬 나가분가?
허지만 사방 천지에 살구꽃 펑펑 터진들 저 봄날은 저 혼자만 깊어가는디
낸 들 워쩔 것이요, 흐흐흐"
괜시리 이죽거렸다가 본전도 못 건졌다 싶은 석현이
이내 말꼬리 사리며 멈추었던 발 슬금슬금 떼어가는 그 쓸쓸한 뒷모습에
남원할매 그만 가슴이 애려와선 청명햇살 출렁하도록 후렴구 외칩니다.
"이따 저녁에 냉이국 끓여 놓으께 오그라이. 우리 집 마당
에 홍도꽃도 벌겋게 펴부렀어야!"
(그림 : 한천자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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