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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종 - 텅빈 충만시(詩)/고재종 2014. 7. 12. 00:34
이제 비울 것 다 비우고, 저 둔덕에
아직 꺾이지 못한 억새꽃만 하얗게 꽃사래치는 들판에 서면
왠일인지 눈시울은 자꾸만 젖는 것이다
지푸라기 덮인 논, 그 위에 내리는 늦가을 햇살은 한량없이 따사롭고
발걸음 저벅일 때마다 곧잘 마주치는 들국화 떨기는 거기 그렇게 눈 시리게 피어
이 땅이 흘린 땀의 정갈함을 자꾸만 되뇌이게 하는 것이다, 심지어
간간 목덜미를 선득거리게 하는 바람과 그 바람에 스적이는 마른 풀잎조차
저 갈색으로 무너지는 산들 더불어 내 마음 순하게 순하게 다스리고
이 고요의 은은함 속에서 무엇인가로 나를, 내 가슴을 그만 벅차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청청함을 딛고 정정함에 이르른 물빛 하늘조차도 한순간에 그윽해져서는
지난 여름 이 들판에서 벌어진 절망과 탄식과 아우성을 잠재우고
내 무슨 그리움 하나 고이 쓸게 하는 것이다
텅빈 충만이랄까 뭐랄까, 그것이 그리하여
우리 생의 깊은 것들 높은 것들 생의 아득한 것들 잔잔한 것들
융융히 살아오게 하는 늦가을 들판엔 이제 때 만난 갈대만이 흰 머리털 날리며
나를 더는 갈 데 없이 만들어버리고는 저기 겨울새 표표히 날아오는 들 끝으로
이윽고 노심(虛心)의 고개나 들게 하는 것이다(그림 : 최광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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