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성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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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선 - 천수답시(詩)/이성선 2019. 7. 4. 12:33
도시의 길들은 바둑판 줄처럼 구획져 뻗고 인간들 마음도 그 길 따라 굳어지고 마침내 이 땅 들의 논들도 모두 가로세로 반듯하게 정리 되어 바람조차 조심히 비켜 간다. 그러나 기계가 들어가지 못하는 산골 하늘물만 받아서 벼를 기르는 천수답 밤에는 별빛을 기르고 개구리 소리만 가득한 골짜기 논배미가 너무 작아 사람의 손으로만 가꾼다. 쟁기와 쇠스랑이 유일한 농기구 구불구불한 논둑의 하늘물받이 논 층층으로 계단이 진 사다리 논 이곳에서만 아직 농부의 음악이 들린다. 사람과 하늘이 단독으로 만난다. 밤마다 큰 별이 내려와 잠드는 곳 하늘의 눈물이 벼를 기른다. (그림 : 김순이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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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선 - 고향의 천정시(詩)/이성선 2014. 8. 21. 23:36
밭둑에서 나는 바람과 놀고 할머니는 메밀밭에서 메밀을 꺾고 계셨습니다 늦여름의 하늘빛이 메밀꽃 위에 빛나고 메밀꽃 사이사이로 할머니는 가끔 나와 바람의 장난을 살피시었습니다 해마다 밭둑에서 자라고 아주 커서도 덜 자란 나는 늘 그러했습니다만 할머니는 저승으로 가버리시고 나도 벌써 몇 년인가 그 일을 까맣게 잊어버린 후 오늘 저녁 멍석을 펴고 마당에 누우니 온 하늘 가득 별로 피어 있는 어릴적 메밀꽃 할머니는 나를 두고 메밀밭만 저승까지 가져가시어 날마다 저녁이면 메밀밭을 매시며 메밀밭 사이사이로 나를 살피시고 계셨습니다 (그림 : 박준은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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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선 - 논두렁에 서서시(詩)/이성선 2014. 8. 21. 23:33
갈아놓은 논고랑에 고인 물을 본다. 마음이 행복해진다. 나뭇가지가 꾸부정하게 비치고 햇살이 번지고 날아가는 새 그림자가 잠기고 나의 얼굴이 들어 있다. 늘 홀로이던 내가 그들과 함께 있다. 누가 높지도 낮지도 않다. 모두가 아름답다. 그 안에 나는 거꾸로 서 있다. 거꾸로 서 있는 모습이 본래의 내 모습인 것처럼 아프지 않다. 산도 곁에 거꾸로 누워 있다. 늘 떨며 우왕좌왕하던 내가 저 세상에 건너가 서 있기나 한 듯 무심하고 아주 선명하다. (그림 : 김대섭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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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선 - 경작(耕作)시(詩)/이성선 2014. 8. 21. 23:28
새벽에 농부는 밭을 간다. 쟁깃날에 햇빛이 갈리어 밭고랑에 넘어진다. 고랑마다 번쩍이는 하늘 물소리. 밤내 껴안고 신음하던 마음의 밭뙈기를 꺼내 벌판에 펼쳐놓고 힘껏 갈아가는 농부 넘어지며 부서지며 농부는 밭을 간다. 돌밭을 갈고 바람을 갈고 산악을 갈고 아내의 바닥에 고인 슬픔을 갈고 아이의 눈 속에 핀 새소리를 갈고. 그가 갈아온 밭고랑에 고인 눈물 하늘에나 빛나는 가난한 물빛 일생을 갈고 와 이제 황혼의 밭끝에 섰다. 그의 발 아래 다 갈려 넘어진 벌판 찢긴 밭고랑에 피빛으로 타는 놀 노을 속에 끝내 자기마저 갈아버리는 그의 뒷모습이 어둠에 잠기고 있다. (그림 : 김대섭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