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류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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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시화 - 바람부는 날의 꿈시(詩)/류시화 2014. 7. 24. 00:28
바람부는 날 들에 나가 보아라. 풀들이 억센 바람에도 쓰러지지 않는 것을 보아라. 풀들이 바람 속에서 넘어지지 않는 것은 서로가 서로의 손을 굳게 잡아 주기 때문이다. 쓰러질 만하면 곁의 풀이 또 곁의 풀을, 넘어질 만하면 곁의 풀이 또 곁의 풀을 잡아주고 일으켜 주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이보다 아름다운 모습이 어디 있으랴. 이것이다. 우리가 사는 것도 우리가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것도. 바람부는 날 들에 나가 보아라. 풀들이 왜 넘어지지 않고 사는 가를 보아라. (그림 : 안기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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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시화 - 옹이시(詩)/류시화 2014. 7. 24. 00:11
흉터라고 부르지 말라 한때는 이것도 꽃이었으니 비록 빨리 피었다 졌을지라도 상처라고 부르지 말라 한때는 눈부시게 꽃물을 밀어올렸으니 비록 눈물로 졌을지라도 죽지 않을 것이면 살지도 않았다 떠나지 않을 것이면 붙잡지도 않았다 침묵할 것이 아니면 말하지도 않았다 부서지지 않을 것이면, 미워하지 않을 것이면 사랑하지도 않았다 옹이라고 부르지 말라 가장 단단단 부분이라고 한때는 이것도 여리디 여렸으니 다만 열정이 지나쳐 단 한 번 상처로 다시는 피어나지 못했으니 (그림 : 서정도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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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시화 - 목련시(詩)/류시화 2014. 1. 27. 22:45
목련을 습관적으로 좋아한 적이 있었다 잎을 피우기도 전에 꽃을 먼저 피우는 목련처럼 삶을 채 살아보기도 전에 나는 삶의 허무를 키웠다 목련나무 줄기는 뿌리로부터 꽃물을 밀어올리고 나는 또 서러운 눈물을 땅에 심었다 그래서 내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모든 것을 나는 버릴 수 있었지만 차마 나를 버리진 못했다 목련이 필 때쯤이면 내 병은 습관적으로 깊어지고 꿈에서마저 나는 갈 곳이 없었다 흰 새의 날개들이 나무를 떠나듯 그렇게 목련의 흰 꽃잎들이 내 마음을 지나 땅에 묻힐 때 삶이 허무한 것을 진작에 알았지만 나는 등을 돌리고 서서 푸르른 하늘에 또 눈물을 심었다 (그림 : 오유화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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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시화 - 나무시(詩)/류시화 2014. 1. 11. 13:42
나에게 나무가 하나 있었다 나는 그 나무에게로 가서 등을 기대고 서 있곤 했다 내가 나무여 하고 부르면 나무는 그 잎들을 은빛으로 반짝여 주고 하늘을 보고 싶다고 하면 나무는 저의 품을 열어 하늘을 보여 주었다 저녁에 내가 몸이 아플 때면 새들을 불러 크게 울어 주었다 내 집 뒤에 나무가 하나 있었다 비가 내리면 서둘러 넓은 잎을 꺼내 비를 가려 주고 세상이 나에게 아무런 의미로도 다가오지 않을 때 그 바람으로 숨으로 나무는 먼저 한숨지어 주었다 내가 차마 나를 버리지 못할 때면 나무는 저의 잎을 버려 버림의 의미를 알게 해주었다 (그림 : 강인주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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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시화 - 낙타의 생시(詩)/류시화 2014. 1. 3. 22:27
사막에 길게 드리워진 내 그림자 등에 난 혹을 보고 나서야 내가 낙타라는 걸 알았다 눈썹 밑에 서걱이는 모래를 보고서야 사막을 건너고 있음을 알았다 옹이처럼 변한 무릎을 만져 보고서야 무릎 기도 드릴 일 많았음을 알았다 많은 날을 밤에도 눕지 못했음을 알았다 자꾸 넘어지는 다리를 보고서야 세상의 벼랑 중에 마음의 벼랑이 가장 아득하다는 걸 알았다 혹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음을 보고서야 무거운 생을 등에 지고 흔들리며 흔들리며 사막을 건너왔음을 알았다 (그림 : 김은송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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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시화 - 돌 속의 별시(詩)/류시화 2014. 1. 3. 22:26
돌의 내부가 암흑이라고 믿는 사람은 돌을 부딪쳐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돌 속에 별이 갇혀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다 돌이 노래할 줄 모른다고 여기는 사람은 저물녘 강의 물살이 부르는 돌들의 노래를 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 노래를 들으며 울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돌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아직 모르는 사람이다 돌이 차갑다고 말하는 사람은 돌에서 울음을 꺼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 냉정이 한때 불이었다는 것을 잊은 사람이다 돌이 무표정하다고 무시하는 사람은 돌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안으로 소용돌이치는 파문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 무표정의 모순어법을 (그림 : 남학호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