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류시화
-
류시화 - 첫사랑의 강시(詩)/류시화 2013. 12. 9. 18:14
그 여름 강가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가 너를 처음 사랑하게 되었지 물속에 잠긴 발이 신비롭다고 느꼈지 검은 돌들 틈에서 흰 발가락이 움직이며 은어처럼 헤엄치는 듯했지 너에 대한 다른 것들은 잊어도 그것은 잊을 수 없지 이후에도 너를 사랑하게 된 순간들이 많았지만 그 첫사랑의 강 물푸레나무 옆에서 너는 아직도 나를 기다리고 있지 많은 여름들이 지나고 나 혼자 그 강에 갔었지 그리고 두 발을 물에 담그고 그 자리에 앉아 보았지 환영처럼 물속에 너의 두 발이 나타났지 물에 비친 물푸레나무 검은 그림자 사이로 그 희고 작은 발이 나도 모르게 그 발을 만지려고 물속에 손을 넣었지 우리를 만지는 손이 불에 데지 않는다면 우리가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는가 기억을 꺼내다가 그 불에 데지 않는다면 사랑했다고 할 수 있는가..
-
류시화 - 사랑의 기억이 흐려져간다시(詩)/류시화 2013. 11. 28. 10:36
시월의 빛 위로 곤충들이 만들어 놓은 투명한 탑 위로 이슬 얹힌 거미줄 위로 사랑의 기억이 흐려져간다 가을 나비들의 날개짓 첫눈 속에 파묻힌 생각들 지켜지지 못한 그 많은 약속들 위로 사랑의 기억이 흐려져간다 한때는 모든 것이 여기에 있었다, 그렇다, 나는 삶을 불태우고 싶었다 다른 모든 것이 하찮은 것이 되어 버릴 때까지 다만 그것들은 얼마나 빨리 내게서 멀어졌는가 사랑의 기억이 흐려져간다 여기, 거기, 그리고 모든 곳에 멀리, 언제나 더 멀리에 말해 봐 이 모든 것을 위로 넌 아직도 내 생각을 하고 있는가
-
류시화 - 두 사람만의 아침시(詩)/류시화 2013. 11. 28. 10:35
나무들 위에 아직 안개와 떠나지 않은 날개들이 있었다 다하지 못한 말들이 남아 있었다 오솔길 위로 염소와 구름들이 걸어왔지만 어떤 시간이 되었지만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사람과 나는, 여기 이 눈을 아프게 하는 것들 한때 한없이 투명하던 것들 기억 저편에 모여 지금 어떤 둥근 세계를 이루고 있는 것들 그리고 한때 우리가 빛의 기둥들 사이에서 두 팔로 껴안던 것들 말하지 않았다 그 사람과 나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한때 우리가 물가에서 귀 기울여 주고받던 말들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가고 새와 안개가 떠나간 숲에서 나는 걷는다 걸어가면서 내 안에 일어나는 옛날의 불꽃을 본다 그 둘레에서 두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숲의 끝에 이르러 나는 뒤돌아본다 (그림 : 안모경 화백)
-
류시화 - 전화를 걸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시(詩)/류시화 2013. 11. 28. 10:33
당신은 마치 외로운 새 같다 긴 말을 늘어놓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당신은 한겨울의 저수지에 가 보았는가 그곳에는 침묵이 있다. 억새풀 줄기에 마지막 집을 짓는 곤충의 눈에도 침묵이 있다. 그러나 당신의 침묵은 다르다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누구도 말할 수 없는 법 누구도 요구할 수 없는 삶 그렇다, 나 또한 갑자기 어떤 깨달음을 얻곤 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정작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생각해 보라, 당신도 한때 사랑을 했었다. 그때 당신은 머리 속에 불이 났었다. 하지만 지금 당신은 외롭다 당신은 생의 저편에 서 있다. 그 그림자가 지평선을 넘어 전화선을 타고 내 집 지붕 위에 길게 드리워진다.. (그림 : 김준용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