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박재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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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삼 - 물의 행로(行路)시(詩)/박재삼 2017. 6. 9. 12:15
강물이 처음에는 산골에서 소리를 카랑카랑 울리더니, 그것은 예닐곱 살 때의 우리들 맑고 시원한 노래소리에나 비길 수 있을까. 이 바다에 다 와 가는 길목에 접어들면 이제 그런 소리는 완전히 졸업하고 다만 바람과 햇빛이 제일 친한 것인가, 굼틀굼틀 반짝이는 한가지 동작(動作)으로만 나가네. 드디어 바다에 다 빠져들고 나서는 그저 무심(無心)한 듯 소리가 죽고 그것을 대신하는가 가다가 튼 기선(汽船)이 지나가면서 세월아 잠시 멈추었거라 고동을 울리고 있네. (그림 : 김윤종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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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삼 - 신록에 접을 부쳐시(詩)/박재삼 2017. 6. 8. 12:16
사랑은 어려운 슬픔을 넘어 서툰 기쁨을 두른 채 연초록으로 남몰래 오고 있네. 처음에는 아주 여리게, 다음에는 그냥 여리게, 그것이 차츰 강도(强度)를 더해가 쟁쟁쟁 천지의 비밀을 캘 듯이 희한한 소리를 곁들인 채 이제는 진초록빛 쪽을 향해 부지런히 가고 있는 것이 역력히 역력히 들리네. 해마다 겪는 이 경치를 내 가슴에 뿌듯이 안으면서 한편으로 멍하게 물고기를 놓친 듯한 소년으로 돌아오는, 이 신선티 신선한 허망함이여. 접붙이기 : 서로 다른 두 개의 식물을 인위적으로 만든 절단면을 따라 이어서 하나의 개체로 만드는 재배 기술을 말한다. 이 경우 일반적으로 한 식물은 뿌리를 남겨 영양분을 공급해 주는 바탕 나무가 되는데, 이런 나무를 대목(臺木: rootstock)이라고 하며 실제로 인간이 과실 등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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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삼 - 고향 소식시(詩)/박재삼 2016. 11. 5. 09:50
아, 그래, 건재약 냄새 유달리 구수하고 그윽하던 한냇가 대실 약방…… 알다 뿐인가 수염 곱게 기르고 풍채 좋던 그 노인께서 세상을 떠났다고? 아니, 그게 벌써 여러 해 됐다고? 그리고 조금 내려와서 팔포 웃동네 모퉁이 혼자 늙으며 술장사하던 사량섬 창권이 고모, 노상 동백기름을 바르던 아, 그분 말이라, 바람같이 떴다고? 하기야 사람 소식이야 들어 무얼 하나, 끝내는 흐르고 가고 하게 마련인 것을…… 그러나 가령 둔덕에 오르면 햇빛과 바람 속에서 군데 군데 대밭이 아직도 그전처럼 시원스레 빛나며 흔들리고 있다든지 못물이 먼 데서 그렇다든지 혹은 섬들이 졸면서 떠 있다든지 요컨대 그런 일들이 그저 내 일같이 반갑고 고맙고 할 따름이라네 (그림 : 김충곤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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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삼 - 한(恨)시(詩)/박재삼 2014. 2. 17. 11:56
감나무쯤 되랴 서러운 노을빛으로 익어가는 내 마음 사랑의 열매가 달린 나무는! 이것이 제대로 벋을 데는 저승밖에 없는 것 같고 그것도 내 생각하던 사람의 등 뒤로 벋어가서 그 사람의 머리 위에서나 마지막으로 휘드려질까본데. 그러나 그 사람이 그 사람의 안마당에 심고 싶던 느껴운 열매가 될는지 몰라! 새로 말하면 그 열매 빛깔이 전생(前生)의 내 전(全) 설움이요 전(全) 소망인 것을 알아내기는 알아낼는지 몰라! 아니, 그 사람도 이 세상을 설움으로 살았던지 어쨌던지 그것을 몰라, 그것을 몰라! (그림 : 박광진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