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심재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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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휘 - 지저귀는 저 새는시(詩)/심재휘 2023. 1. 26. 06:35
가끔씩 내 귓속으로 돌아와 둥지를 트는 새 한 마리가 있다 귀를 빌려준 적이 없는데 제 것인 양 깃들어 울고 간다 열흘쯤을 살다가 떠난 자리에는 울음의 재들이 수북하기도 해 사나운 후회들 가져가라고 나는 먼 숲에 귀를 대고 한나절 재를 뿌리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열흘 후는 울음 떠난 둥지에 아무것도 남아 있질 않아 넓고 넓은 귓속에서 몇 나절을 나는 해변에 밀려 나온 나뭇가지처럼 마르거나 젖으며 살기도 한다 새소리는 새가 떠나고 나서야 더 잘들리고 새가 멀리 떠나고 나서야 나도 소리 내어 울고 싶어진다 (그림 : 안기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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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휘 - 이름없는 그 나무시(詩)/심재휘 2022. 10. 10. 08:02
숲에는 그 나무가 있어서 오늘도 나는 숲을 나와 집으로 간다 숲속에 머물던 시간은 길지 않았으나 갖은 모양의 잎 들 모든 나무들의 이름이야 다 알 수는 없지만 내 물음에 함 께 흔들리던 그 나무의 이름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 이름이야 생각나지 않을 수 있지만 내게 따뜻한 방향을 가리켜주던 그 가지들의 몸짓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 가느다 란 햇살을 내어주던 잎들의 뒤척임을 내내 잊어서는 안 되 겠지 숲 밖은 흐려 곧 비가 올 표정, 나는 집으로 가는 저물녘 저녁은 걸음에 흥건하게 묻고 나는 이름을 묻지 못했구나 숲에는 그저 그 나무가 이름을 잃고 그루터기만 남은 그 나 무가 있어서 찾아갈 때마다 자리가 되어주던 그 나무가 있 어서 아주 오래된 그의 자세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되겠지 (그림 : 심수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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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휘 - 다시 우미당을 위하여시(詩)/심재휘 2022. 7. 31. 22:47
갑자기 누군가가 당신의 등 뒤에서 부르는 것 같아 한번쯤 돌아보며 속아도 보고 싶다면 이제는 어떤 새벽의 빛도 가 닿지 못하는 꿈의 어둑한 저편에서 여전히 아침이면 피어나는 빵 굽는 냄새여 몇 번의 기억을 건너온 숨죽인 슬픔이여 아침마다 배달되는 삶은 지겹고 뜯어 먹는 하루로 매양 헛배만 부르다면 어느 날 문득 당신이 정말 맛있어지고 싶다면 멀고 먼 고향의 참 오래전 빵집 우미당 진열대에 놓인 갓 구운 그날들에게 잠시라도 몸을 묻으며 다시 한번 용서를 그리고 우리는 다시 오늘을 반죽하는 것이다 설익거나 타지 않도록 오븐 속의 인생을 보며 입 안에 번지는 눈물의 깊은 힘을 음미하기 위해 이제는 빵이 익기를 말없이 기다리는 것이다 그 옛날 우미당 아저씨가 날마다 우리를 위해 그랬던 것처럼 (그림 : 임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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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휘 - 높은 봄 버스시(詩)/심재휘 2022. 6. 6. 23:09
계단을 들고 오는 삼월이 있어서 몇 걸음 올랐을 뿐인데 버스는 높고 버스는 간다 차창 밖에서 가로수 잎이 돋는 높이 누군가의 마당을 내려다보는 높이 버스가 땀땀 이 설 때마다 창밖으로는 봄의 느른한 봉제선이 만져진다 어느 마당에서는 곧 풀려 나갈 것 같은 실밥처럼 목련이 진다 다시없는 치수의 옷 하나가 해지고 있다 신호등 앞에 버스가 선 시간은 짧고 꽃이 지는 마당은 넓고 ‘연분홍 치마가 바람에 휘날리더라’ 그다음 가사가 생각나지 않아서 휘날리지도 못하고 목련이 진다 빈 마 당에 지는 목숨을 뭐라 부를 만한 말이 내게는 없으니 목련은 말없이 지고 나는 누군 가에게 줄 수 없도록 높은 봄 버스 하나를 갖게 되었다 (그림 : 고재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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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휘 - 가을 기차시(詩)/심재휘 2022. 5. 5. 21:05
가을은 오고 기차는 갑니다 우리가 때로 작은 역들을 그냥 지나치는 것은 가을 기차가 멀리 간다는 뜻입니다 내가 앉은 자리는 기차표에 적힌 대로 역방향이고요 미래를 등지고 앉아버린 이 자리는 지나간 것들만 볼 수 있는 자세입니다 다가오는 풍경은 마주 앉은 이의 다정한 눈동자에만 있습니다 어느 역에서 그 사람 나를 두고 내린다면 나는 미래를 잃고 가을 기차는 멀리 갈 뿐입니다 잠시 정차한 작은 역에서 몇은 내리고 몇은 탑니다 철길 너머 반쯤 무너진 돌집이 햇살에 조금 더 무너집니다 참나무 숲 속에는 간혹 쓰러진 떡갈나무가 있고 막 내렸는지 벤치에 앉아 기차를 바라보는 한 여자를 두고 이내 기차는 떠납니다 사라지도록 먼 곳으로 멀리 갈 뿐입니다 가다 보면 기차에서 내려 며칠 묵을 만한 마을이 어딘가에 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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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휘 - 안목을 사랑한다면시(詩)/심재휘 2022. 5. 5. 16:16
해변을 겉옷처럼 두르고 냄새나는 부두는 품에 안고 남대천 물을 다독여 바다로 들여보내는 안목은 한 몸 다정했다 걸어서 부두에 이른 사람이나 선창에 배를 묶고 뱃일을 마친 사람이나 안목의 저녁에 서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바람의 방향은 밤과 낮이 달랐다 그때마다 묶인 배는 갸웃거리기만 했다 모든 질문에 다 답이 있는 게 아니었다 여기가 물이 끝나는 곳인가 물으면 그저 불을 켜서 저녁을 보여주는 안목 묻는 건 사람의 몫이고 밤바다로 떠나가는 배를 보여주기만 하는 안목 우리가 삶을 사랑한다면 안목에게 묻지를 말아야지 불 켜진 안목을 사랑한다면 천천히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잊지는 말아야지 (그림 : 차일만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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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휘 - 이발소라는 곳시(詩)/심재휘 2021. 4. 3. 08:05
불쑥 오래된 이발소에 가고 싶다 멀기도 하고 가깝기도 한 곳 해질 무렵 집에도 가기 싫을 때 뜻밖의 이발소를 마음 속에 짓고 하나밖에 없는 의자에 앉으면 나는 너무 오랫동안 허락도 없이 이발소를 다녔구나 오랫동안 거울 속에 건네다 주었던 표정들을 돌려받고 싶다 그리고 후드득 떨어지는 머리카락들을 보며 스르륵 잠이 들고 싶다 머리카락 같은 속마음들을 들키지 않고 그 가늘게 슬픈 것들을 바닥에 내려놓고 툭 가볍게 떨어지는 머리칼같이 빙긋 웃으며 긴 잠을 자고 싶다 (그림 : 남성훈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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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휘 - 사근진시(詩)/심재휘 2021. 1. 19. 14:05
오래전에 철거된 무허가 소주집은 경포 해변의 끝이었다 이름이 없고 사방이 유리창이어서 그냥 유리집이었다 한 뼘 더 변두리인 사근진이 잘 보였다 경포에서 왼쪽으로 지척인 사근진은 사기장수가 살았다던 나루 여름해변의 가장자리에 놓여 경포도 아니고 그 너머도 아닌 가을의 바닷가 모래로 그릇을 굽던 시간은 이제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곳 사라진 나루에는 한 짐 가득 사기를 지고 깨지지 않도록 걷던 사람이 있었을 테지 그가 걸었던 변두리가 없었더라면 파도가 자꾸 넘어져 깨어져도 이렇게 고요만 쌓이는 오후는 없었을 테지 사근진이 없다면 바라볼 경포도 없었을 테지 불 속으로 뛰어들던 침묵들로 불을 빚어내던 아름다운 변방 사근진 사근진 - 강원도 강릉시 안현동에 있으며 길이 600m, 24,000㎡의 백사장이 있는 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