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심재휘
-
심재휘 - 안목시(詩)/심재휘 2018. 1. 9. 09:56
경포보다 안목이 나는 좋았지 늦가을까지 걸어 안목에 마침내 안목에 가면 수전증을 오래 앓은 희망이 쏟을 듯 쏟아질 듯 자판기 커피를 빼어 들고 오래 묵은 파도 소리가 여전히 다정해서 좋았지 경포 횟집 거리를 지나 초당 순두부 집들을 지나 더 가물거리는 곳 해송 숲의 주인 없는 무덤을 지날 때처럼 늦어도 미안하지 않은 안목에서는 바다로 막 들어가는 강물이 지는 해를 돌아볼 줄 알아서 좋았지 숨겨둔 여인이 있을 것 같고 그조차 흉이 될 것 같지 않은 곳 마른바람 속에서 팔 벌리기를 하고 멀리 경포의 불빛을 바라볼 줄 아는 안목은 더이상 골똘히 궁근 그 안목은 이제 없는 거지 막횟집도 칼국숫집도 다 사라지고 커피 거리로 이름을 날리는 저기 저 안목은 안목(安木) : 강원도 강릉시 창해로14번길 견소동에 위치한..
-
심재휘 - 오늘,시(詩)/심재휘 2017. 12. 10. 21:10
한 그루의 느티나무를, 용서하듯 쳐다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나는 얼마나 행복한 것이냐 저녁이 되자 비는 그치고 그 젖은 나무에도 불이 들어온다 내가 마른 의자를 찾아 앉으면 허튼 바람에도 펼쳐진 책이 펄럭이고 몇 개의 문장들은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러면 길 위에 떨어진 활자들 서둘러 주울 때 느닷없이 다가와 말을 거는 수많은 어둠들 저 느티나무 밑을 지나는 오래된 귀가도 결국 어느 가지 끝에서 버스를 기다릴 테지 정류장에서 맞이하는 미래처럼 서로 닮은 가지들의 깜박거리는 불빛 속마다 조금씩 다른 내가, 조금씩 다른 표정으로 앉아 있을 테지, 벗겨도 벗겨도 끝내 속내를 보여 주지 않는 오늘들 그런 것이다 생의 비밀을 훔쳐본 듯 내게로 온 투명한 하루가, 서서히 그러나 불치병처럼 벗겨지는 풍경을 홀로 지켜보는..
-
심재휘 - 폭설시(詩)/심재휘 2017. 11. 16. 19:07
밤에 편지를 쓰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다 보고 싶은 사람들이 겉봉에서 낡아갔다 회귀선 아래로 내려간 태양처럼 따뜻한 상징은 돌아오지 않았다 내내 거친 눈이 내렸다 사람들은 눈싸움을 하며 추억을 노래했으나 단단하게 뭉쳐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제설차가 지나온 길은 다시 눈에 덮이고 눈 먹은 신호등만 불길하게 깜빡거렸다 바람이 모든 것을 얼어붙게 하였으므로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였다 모두들 주머니 깊숙이 손을 넣고 수상한 암호 만지듯 동전만 만지작거렸다 나는 어두운 창고에서 첫사랑을 생각해야 했다 언 손을 불며 자전거 바퀴를 고치다가 씀바귀며 여뀌며 쑥부쟁이를 몰래 생각하였다 (그림 : 김종언 화백)
-
심재휘 - 겨울 입술시(詩)/심재휘 2016. 9. 28. 01:07
그대를 등지고 긴 골목을 빠져나올 때 나는 겨울 입술을 가지게 되었다 오후 한 시 방향에서 들어오는 낙뢰가 입술을 스치고 갔다 그 후로 옛날을 말할 때마다 꼭 여미지 못하는 입술 사이로 쓰러지지도 못하는 빗금의 걸음을 흘려야 했다 골목의 낮은 쇠창살들은 녹슬어갔지만 뱉어놓은 말들은 벽에서 녹고 또 얼었다 깨어진 사랑이 운석처럼 박힌 이별의 얼굴에는 저녁과 밤 사이로 빠져나간 낙뢰가 있더니 해가 진 일곱 시의 겨울 입술은 어둠을 들이밀어도 다물 수 없도록 기울어져서 들리지 않는 말들을 넘어지지 않게 중얼거려야 했다 진실을 말해도 모두가 비스듬한 후회가 되었다 (그림 : 김구 화백)
-
심재휘 - 세월이 가면시(詩)/심재휘 2016. 8. 23. 00:53
설익게 술을 마시고 서투르게 노래방에 들렀다가 돌아와 깊게 잠든 밤이었습니다 꿈이 아닌 듯 생생하게 마이크를 잡고 '세월이 가면 가슴이 터질 듯한 그리운 마음이야 잊는다해도' 소리쳐 부르다가 목이 메었습니다 꿈의 바깥에다 두고 온 것이 있었는지 한순간에 곤한 잠에서 각성의 방 안으로 옮겨와 보니 소한에 접어든 한밤중이었습니다 꿈속에서의 울음이 여전히 목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남은 잠을 마저 자기에는 세월은 너무 흘러가버렸고 문 앞에 나가보니 신문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밤에도 새가 우는지 아니 어느 먼 별이 우는지 반짝거리며 글썽거리며 세월이 갔습니다 노래 한 소절 부르는 사이에 나의 세월만 갔습니다 (그림 : 장용길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