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심재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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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휘 - 그 사내의 고향 말시(詩)/심재휘 2016. 1. 16. 09:30
봄비도 표준말로 내리는 서울의, 구파발을 떠나 머나 먼 수서 가는 땅속 길, 안냐하새요 아냐하새요 타관을 떠돌아도 오래였을 사내 하나가 비옷을 입고 비옷을 판다 지금쯤 봄날 아침상에 오를 부새우 국처럼, 누덕나물처럼 내 고향 말은 하도 진해서 그 말 잘 다려 펴 서울 말인 듯해도 금세 알아 듣겠네 고향 솔숲에 부는 바람소리, 코앞에 훅 끼치는 짠 파도소리 마커가 모두로 변하고 머나가 뭐니로 곰살맞아져도 머리 위의 비가 땅을 적시듯, 땅 속을 흘러 다시 온 곳으로 돌아가듯, 수백 년 우리 몸을 퉁명스럽게 적시던 말, 할 말이 없어 발끝만 볼 때에도 침묵 속에서 꽃 피던 말 천 원 한 장에 모시께요 비옷을 입고 통로를 지나가는 옹이 백인 말, 나생이 냄새나는 말, 우리가 아무리 덜컹거리는 열차에 서서 고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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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휘 - 봄꽃나무 한 그루시(詩)/심재휘 2015. 12. 13. 13:58
봄꽃나무는 어쩔 수 없이 나뭇가지 하나로 봄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꽃이 한 나무에 내리기 위해 준비한 그 오랜 시간도 바람 부는 아침의 어느 가지 위에 놓이고 나면 결국 꽃 한 송이의 무게로 흔들릴 뿐 꽃 핀 가지는 또 새 가지를 내어 조금씩 가늘어지는 운명의 날들을 선택한다 그래서 해마다 봄에 관한 나의 고백은 꽃을 입에 문 작은 새처럼 꽃가지에서 빈 가지고 옮겨 앉고 싶을 때가 많았다는 것인데 삶이 시시해진 어느 봄날 만개한 봄꽃나무 밑을 지나다가 나는 꽃들을 거느린 가지들의 그늘에 잠시 누워 활짝 핀 꽃나무의 풍경 하나를 보고 싶어진 것이다 조금씩 다른 표정으로 피는 꽃들이 가지마다 저대로 살아가는 한 나무를 봄꽃나무에 대한 그대의 기억이 단지 그대가 손 내밀어 잡았던 바로 그 가지의 꽃향기로 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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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휘 - 겨울의 질척거리는 밤거리시(詩)/심재휘 2015. 12. 13. 13:57
낯설은 거리였다 눈이 내릴 것 같았다 재앙이 오기 전에 서둘러 대문에 못질하듯 사람들은 투명한 발소리를 내며 걸었지만 겨울의 거리가 어두워지는 것은 아주 쉬웠다 돌아보면 눈 내리는 풍경이 따라왔다 그러면 누구나 폭설을 예상한다 하지만 간혹 운명의 한 귀퉁이 벗겨진 칠 사이로 자신을 닮은 한 사람이 섬광처럼 지나가는 것을 볼 때도 있는 것이다 나는 드디어 골목을 수없이 거느린 밤의 거리로 접어든다 한 거리가 다른 거리로 어떻게 이어지는지 그 곡절에 대해 자시히 알 필요는 없지만 저 골목을 돌면 그 골목을 돌아나오는 나를 딱 마주칠 것 같아 걸음을 멈춘다 건널목의 신호등은 호객꾼처럼 곳곳의 골목을 음산하게 비추고 있다 나는 찬 손을 쉽게 주머니에 넣지 못하고 구두에 쌓여 녹아 가는 눈을 내려다본다 나무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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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휘 - 편지, 여관, 그리고 한 평생시(詩)/심재휘 2015. 12. 13. 13:54
후회는 한 평생 너무나 많은 편지를 썼다는 것이다 세월이 더러운 여관방을 전전하는 동안 시장 입구에서는 우체통이 선 채로 낡아갔고 사랑한다는 말들은 시장을 기웃거렸다 새벽이 되어도 비릿한 냄새는 커튼에서 묻어났는데 바람 속에 손을 넣어 보면 단단한 것들은 모두 안으로 잠겨 있었다 편지들은 용케 여관으로 되돌아와 오랫동안 벽을 보며 울고는 하였다 편지를 부치러 가는 오전에는 삐걱거리는 계단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기도 하였는데 누군가는 짙은 향기를 남기기도 하였다 슬픈 일이었지만 오후에는 돌아온 편지들을 태우는 일이 많아졌다 내 몸에서 흘러나간 맹세들도 불 속에서는 휘어진다 연기는 바람에 흩어진다 불꽃이 '너에 대한 내 한때의 사랑'을 태우고 '너를 생각하며 창밖을 바라보는 나'에 언제나 머물러 있다 내가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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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휘 - 기차 소리시(詩)/심재휘 2015. 12. 13. 13:52
잠을 자려고 눈을 감으면 먼 곳에서 강을 건너는 기차 소리 밤의 들풀을 사납게 흔들며 마을의 낮은 지붕 위를 으르렁거리며 달려왔을 날들의 소리 오무린 자귀나무 잎사귀 잎사귀에서, 제 그림자를 버리고 골목 끝으로 사라져가던 슬픈 뒷모습에서도, 슬쩍 슬쩍 기우는 보름달처럼 가늘게 새어나오던 기차 소리 세상의 모든 기차가 끊어진 시간에 먼 곳에서 강을 건너는 저, 기차소리 희미한 그 소리 잃어버리고 잠들까봐 전전긍긍하는 밤, 기차는 긴 터널을 나와 난데없이 나타난 바다 속으로 폭설을 헤치며 달려 깊고 어두운 숲 속으로 오늘도 자꾸만 멀어지는데 (그림 : 김지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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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휘 - 그 빵집 우미당시(詩)/심재휘 2015. 12. 13. 13:49
나는 왜 어느덧 파리바게트의 푸른 문을 열고 있는가. 봄날의 유리문이여. 그러면 언제나 삐이걱 하며 대답하는 슬픈 이름이여. 도넛 위에 떨어지는 초콜렛 시럽처럼 막 익은 달콤한 저녁이 내 얼굴에 온통 묻어도 나는 이제 더 이상 달지가 않구나 그러니까 그 옛날 강릉 우미당을 나와 곧장 파리바게트로 걸어왔던 것은 아닌데 젊어질수도 없고 늙어질수도 없는 나이 마흔 살. 단팥빵을 고르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 이제는 그 빵집 우미당, 세상에서 가장 향긋한 아침의 문은 더 이상 열리지 않네.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것은 이미 이별한 것. 오늘이 나에게 파리바게트 푸른 문을 열어 보이네. 바게트를 고르는 손이 바게트네. 그러면 식탁에서는 오직 마른 바게트, 하지만 씹을수록 입 안에 고이는, 그래도 씹다 보면 봄날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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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휘 - 내소사(來蘇寺) 풍경소리시(詩)/심재휘 2015. 12. 13. 13:44
곧은 길이었다 한 곳에 이르는 모든 길은 서로 닮는다고 내소사(來蘇寺)는 눈이 쌓이기 전부터 눈빛이었다 처마엔 풍경(風磬) 하나 있었다 누군가가 지핀 향에선 함부로 연기가 오르고 삼삼오오 모여 찍는 빛의 그림 속에도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저의 발 아래 돌아나갈 숲길을 누구나 하염없이 바라볼 때 풍경 하나 얼핏 움직인 것도 같았다 눈 녹으며 봄 오는 내소사의 숲에는 풍경소리 들릴 듯 말 듯 하였는데 풍경(風景) 안에는 그 소리 지워지고 없었다 투명한 겨울 빛도 비껴가는 한 마리 눈 먼 물고기 바람의 풍경은 오랫동안 거기에 매달려 있었다 (그림 : 이성주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