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심재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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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휘 - 빗금의 온도시(詩)/심재휘 2019. 2. 20. 18:40
버스를 타고 지나가다 바라보는 아현동은 봄비 오는 밤이었다 큰길가에는 큰길을 따라 급한 경사로가 있어서 가파른 오르막 축대가 높은 어둠 속으로 스며드는 밤이었다 가로등의 젖은 불빛을 몸에 쓰며 벚꽃들도 옆으로 흩날리며 떨어져 내리막으로 비스듬히 흘러내리는 것이 벚꽃인지 봄비인지 아니면 또 하루였는지 알 수 없어서 미끄러운 빗금들 위를 몸을 곧게 세워 오르던 사람 가파른 축대를 따라 사실은 엎어질 듯 오르던 사람 빗물도 옛날 같은 아현동이었다 비 묻은 차창에 가슴이 높게 고인 아현동을, 없는 동네인 듯 아현동을 빗속에 두고 버스는 곧 비 그칠 것 같은 광화문으로 향하는데 우산도 없이 언덕을 올라가던 사람은 이내 집에 들었으리라만 빗금의 풍경은 번지고 번져서 한동안 지워지지 않을 봄비 오는 밤이었다 빗금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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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휘 - 봄밤은 그에게도 유감인 듯 하였다시(詩)/심재휘 2019. 2. 20. 18:25
막걸리 한통을 사서 배낭에 넣고 메고 가는 봄밤 누군가 따라오는 소리가 있어서 뒤를 돌아보면 아무도 없고 또 아무도 없고 등 뒤는 꽃이 이미 진 길 걸음마다 출렁거리는 소리에 놀라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한밤은 애처로워라 다가와 말 걸어줄 사람도 없이 벚꽃 피던 길 끝은 어둠 속으로 멀고 등 뒤는 이제 그만 보자며 다짐할수록 빈집에 가까워지는 걸음 집 앞에는 어느새 또 꽃을 여읜 나무야 잎들이 이미 싱겁게 돋은 살구나무야 봄밤의 배후에서 정답게 나누어 마시는 유감은 무슨 맛인가 했더니 오늘은 막걸리 한통으로 너와의 우정을 얻었구나. (그림 : 박용섭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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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휘 - 찻잎을 두 번 우리다시(詩)/심재휘 2019. 2. 20. 18:13
녹차 잎을 우려내는 동안 나는 한 여자를 사랑하였습니다 작은 봄 잎 같고 잎에 떨어지는 빗물 같은 여자 둥굴게 말려있던 그녀가 꼭 쥔 주먹을 펴 나에게 내밀자 내 손은 어느새 늙었습니다 차 한 잔을 마시며 저녁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가을 해는 금방 남루해졌습니다 차 한 모금 마시는 사이에도 순식간에 저무는 것들 나는 따뜻한 물로 식어버린 찻잎을 한 번 더 우립니다 생각에 잠긴 것처럼 찻잎들이 잠시 일었다가 가라앉는 사이 내 사랑은 한없이 엷어졌습니다 어느덧 물 같은 당신에게 갇혀버렸습니다 (그림 : 이섭열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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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휘 - 봄밤시(詩)/심재휘 2019. 2. 20. 18:08
날이 저물자 라일락 꽃나무가 내게로 왔다 길의 바깥쪽으로 기운 것은 추억이었는데 몸이 아팠다 두리번거리며 찿아보아도 사람들로 어두워진 길에서 꽃나무는 여전히 보이지가 않았다 밤은 오직 깊어만 갔다 봄날의 여러 저녁 무렵 나는 늘 외로웠으나 스쳐가는 그 고독을 기억하지 못하고 흩날리는 벚꽃잎 사이의 밤으로 걸어 들어가고는 하였다 내일은 아름다워서 더욱 위험하였다 방법이 없었다 라일락 꽃향기가 밤에 더 짙어지는 이유를 모두 알았지만 아무도 말하지는 않았다 나는 줄곧 한 방향으로 걸으면서 내가 만난 꽃들을 노래했다 절망의 뿌리와 분노의 가지 두려움에 떠는 잎들에 대해서는 모른 체했다 생이 우리의 머리카락을 뒤로 날릴 때 꽃은 어김없이 바람에 지고 라일락 잎을 씹으며 배우던 사랑도 낡아갔다 오랫동안 봄밤은 창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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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휘 - 폭설, 그 흐릿한 길시(詩)/심재휘 2019. 1. 11. 17:53
아주 떠나버리려는 듯 가다가 다시 돌아와 소리 없이 우는 듯이 눈이 내린다 어깨를 들썩거리다가 뛰어가다가 뒤돌아서서 폭설이 퍼붓는 길이다 그러면 이런 날은 붉은 신호등에도 길을 건너가버린 그 사랑이 겨우 보이도록 흐릿해져서 이런 날은 도무지 아프지가 않다 부풀어오른 습설이 거리에 온통 너무 흩날려 이편과 저편의 경계가 지워진 횡단보도는 건너지 않는 자들도 그냥 가슴에 품을 만하다 길 옆 나무가 내게 손을 내미는지 내게서 손을 거두어가는지 알 필요가 없고 휘청거리는 저녁은 어디쯤에 있는지 이별은 푸른 등을 켰는지 분간할 필요도 없어서 그저 떨어지는 빗금들이 뒤엉켜 서로의 빗금을 지울 때 흐릿한, 모든 것들, 사이에, 쓰다 만 글자처럼 서 있으면 그날의 윤곽은 악보 없이 부르는 나지막한 노래 같아서 눈코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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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휘 - 11월의 숲시(詩)/심재휘 2018. 11. 22. 09:01
가을이 깊어지자 해는 남쪽 길로 돌아가고 북쪽 창문으로는 참나무 숲이 집과 가까워졌다 검은 새들이 집 근처에서 우는 풍경보다 약속으로 가득한 먼 후일이 오히려 불길하였다 날씨는 추워지지만 아직도 지겨운 꿈들을 매달고 있는 담장 밖의 오래된 감나무에게 작별인사를 한다 이제 나는 숲이 보여주는 촘촘한 간격으로 걸어갈 뿐이다 여러 참나무들의 군락을 가로질러 갈 때 옛사람 생각이 났다 나무들은 무엇인가를 보여주려고 자꾸 몸을 뒤지고는 하였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길쭉하거나 둥근 낙엽들의 기억에 관한 것밖에는 없다 나는 내가 아는 풀꽃들을 떠올린다 천천히 외워보는 지난 여름의 그 이름들을 그러나 피어서 아름다운 순간들에만 해당한다 가끔 두고 온 집을 돌아보기도 하지만 한때의 정처들 어느덧 숲이 되어 가는 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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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휘 - 풍경이 되고 싶다시(詩)/심재휘 2018. 9. 28. 12:08
언젠가 이 집을 떠날 때 한 가지만 가지고 가라 하면 나는 북쪽 창밖의 풍경을 데리고 가겠다. 창문으로 내다보이는 그 은행나무숲에 나는 평생 한 번도 찾아가지를 못하였지. 더 멀어지지도 않고 가까워지지도 않는 숲의 셀 수 없는 표정. 내가 볼 때만 내 안의 풍경이 되는 풍경. 살다보면 이 집의 문도 밖에서 영영 잠글 때가 오겠지. 그러면 창밖 풍경을 데리고 다니다가, 애인인 듯 사귀다가, 나란히 앉아 더 좋은 풍경을 함께 보다가, 그와도 이별을 예감할 때가 오겠지. 그때가 오면 슬쩍 고백해보는 거야.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너의 뒤가 보고 싶어. 그곳으로 가서 너의 창밖에 사는 한 마리 무심한 풍경이 되고 싶다고 부탁해보는 거야. 누군가의 영원히 좁혀지지 않는 풍경으로 살아간다는 거, 비바람에 함부로 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