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심재휘
-
심재휘 - 슬픈 박모(薄募)시(詩)/심재휘 2015. 10. 27. 22:06
가을 저녁의 해는 항상 우리가 잠시 한눈파는 사이에 져버립니다 그러면 어두워지기 전에 사람들은 서둘러 사랑을 하고 출장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낡은 구두를 벗고 손자의 손을 잡은 할머니는 천천히 횡단보도를 건너갑니다 서툴지만 더 어두워지기 전에 해 지고도 잠시 더 머무는 저 빛들로 세상은 우리의 눈을 잠시 미숙하게 하고 낮과 밤이 늘 서로를 외면하는 이 시간이면 강변대로의 갓길에 차를 세우고 싶었습니다 해 지고 어두워지기 전 흐르는 강물을 아직은 똑똑히 바라볼 수 있을 때 어디론가로 무섭게 달려가는 차들을 보며 이루지 못하였던 한때의 사랑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해 지고 어두워지기 전 보이지 않는 빛을 머금고 자꾸만 멀어져가는 저 구름들처럼 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용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해..
-
심재휘 - 징검돌 위에서시(詩)/심재휘 2015. 5. 9. 22:21
맑은 날인데 개울물이 뜻밖에 빠르고 징검돌들은 얼굴을 가린 채 젖어 있다 상류 쪽 먼 산기슭에서는 언젠가 구름이 몰려오고 비가 왔겠다 종내에는 비도 그치고 세월은 흘렀겠다 한데 어찌하여 그날의 빗소리는 이곳까지 흘러왔나 눈 감은 징검돌들 사이에서 왜 소리 죽여 울고 있나 지나간 어느 먼 날에 처음 발 앞에 돌을 놓으며 개울을 건너가려던 한 사람 있었겠다 마음을 점점이 떨어트리고 기어이 개울을 건너간 사람 있었겠다 서로 손을 잡을 수도 없고 거둘 수도 없는 징검돌 사이의 쓸쓸한 간격을 따라갈 때 어느덧 익숙한 보폭 아래로 사무치도록 투명한 물이 흘러갈 때 지울 수 없는 물의 무늬들만 흘러가지 못할 때 이런 날은 내 가슴속에도 물을 건너가던 사람 하나 자꾸 그리워지겠다
-
심재휘 - 조금 늦은 것들시(詩)/심재휘 2015. 2. 7. 17:43
한 나무 가득 꽃들이 피어 그 나무 벚나무인 줄 잘 알겠네 가지와 가지 사이 빌려온 풍경에도 꽃들은 제 이름으로 범람해 있어 분홍의 그늘 안에서 우는 새 한 마리 꽃에 가려 보이지 않네 아마도 사랑을 잃은 듯 그 소리 슬펐네 가느다란 가지 하나를 꼭 쥐고 조금 늦었을 뿐인데 아주 늦은 노래를 혼자 불러야 하는 얼굴 없는 새여 이별은 늘 조금 빠르다네 이별은 바람처럼 온다네 어느 아침 저 꽃들이 몰려드는 후회인 듯 쏟아져 흩어지고 나면 그 나무 빛나는 이름을 잃고 그냥 길가의 나무 한 그루가 될 테지 그러면 꽃보다 조금 늦게 피어도 벚나무인 잎들 남은 계절 내내 뭇 초록의 나무에 매달려 이내 바람에 묻혀버리고 마는 꽃나무의 이름을 소리쳐 불러야 한다네 조금 늦은 것들은 언제나 그렇게 (그림 : 김왕주 화백)
-
심재휘 - 가랑비 오는 저녁에 닿다시(詩)/심재휘 2014. 12. 6. 00:22
감 하나가 가지를 떠나 제가 만든 그늘 속으로 떨어졌다 대책 없이 드러나는 건 매양 속살인 듯 붉게 무른 곳에서 질척거리는 거리로 흘러나온 마음이 가랑비 오는 저녁에 닿는다 이별의 어떤 연유가 흥건히 묻은 땅바닥으로부터 고개를 들어 감이 그으며 내려온 선을 거슬러 오른다 그가 둥둥 떠 있던 허공의 어떤 행복까지 뒷걸음질쳐보고 싶은 저물녘에 나는 닿아 있는 것이다 뒷걸음으로 골목을 돌아나가서 까마득히 먼 길 끝 비오는 그해 가을로 뒷걸음질 하면 아직도 그 사람은 거기 있을 것도 같고 우산을 접고 들어가 창가 그 자리에 벌떡 앉으면 감았던 눈을 뜨고 흩어지던 날숨들을 거두어들이면 잃었던 사랑을 다시 찾을 것 같은데 끝내는 떨어져 가랑비 맞는 감 떨어지고 나서도 마저 익어가는 감 하나가 오늘은 가랑비 오는 저..
-
심재휘 - 우산을 쓰다시(詩)/심재휘 2014. 9. 27. 11:44
어제는 꽃잎이 지고 오늘은 비가 온다고 쓴다 현관에 쌓인 꽃잎들의 오랜 가뭄처럼 바싹 마른 나의 안부에서도 이제는 빗방울 냄새가 나느냐고 추신한다 좁고 긴 대롱을 따라 서둘러 우산을 펴는 일이 우체국 찾아가는 길만큼 낯설 것인데 오래 구겨진 우산은 귑게 젖지 못하고 마른 날들은 쉽게 접히지 않을 터인데 빗소리처럼 오랜만에 네 생각이 났다고 쓴다 여러 날들 동안 비가 오지 않아서 많은 것들이 말라 버렸다고 비 맞는 마음에는 아직 가움에서 환도하지 못한 것들이 많아서 너무 미안하다고 쓴다 우습게도 이미 마음은 오래 전부터 진창이었다고 쓰지 않는다 우산을 쓴다 (그림 : 김주형 화백)
-
심재휘 - 그늘시(詩)/심재휘 2014. 9. 27. 11:42
그늘이 짙다 8월 해변에 파라솔을 펴면 정오의 그늘만큼 깊은 우물 하나 속없이 내게로 와 나는 그 마음에 곁방살이하듯 바닷가의 검은빛 안에 든다 한나절 높게 울렁거리던 파도가 슬픈 노래의 후렴처럼 잦아드는 때 더운 볕도 기울고 그늘막도 기울어 조금씩 길어지던 그늘은 어느덧 바닷물에 가 닿는다 물빛을 닮은 그늘은 넉넉하다 우물 안의 맑은 샘물처럼 그늘은 이제 바다에서 흘러나온다 바다 속의 넓은 고독으로부터 슬며시 빠져나온 손 하나가 내 발을 덮고 가슴을 덮는다 곧 있으면 제 빛의 영토로 돌아갈 찬 손 하나가 그러나 그늘은 큰 그늘 속으로 돌아갈 뿐 내 곁에서 사라지지 않으나 다만 내가 못 볼 뿐이니 밝았다 저무는 것은 내 안의 빛이었으니 넓고 넓은 바닷가에 내가 덮고 있는 그늘 하나 해질녘의 그늘 같은, ..
-
심재휘 - 허물어진 집시(詩)/심재휘 2014. 9. 27. 11:41
태백에서 사북 쪽으로 재를 하나 넘으면 그것은 뒤돌아보지 않겠다는 마음이었겠다 돌의 어둠을 기다랗게 파고 들어가 다시는 돌아 나오지 않겠다는 눈물이었겠다 그러나 이제는 막장 같은 삶도 사라지고 그 말도 사라지고 폐광들 근처 산비탈에는 허물처럼 빈집들만 남아 허물어지고 있다 그 옛날 몇 개의 재를 넘어 이곳까지 밀려와 기울어진 땅에 기울어지지 않게 세운 집 최후의 후회인 듯 최초의 결심인 듯 서 있던 집 생각하면 나에게도 그런 집 하나 있었으리라 검은 낯 씻으며 또 살아졌던 하루가 허리 숙여 들던 그런 집 누구에게나 있었으리라 오지 같은 마음에 세워졌던 집 하나가 (그림 : 김종근 화백)
-
심재휘 - 썰물시(詩)/심재휘 2014. 8. 30. 00:38
물이 멀어진다 처음에는 둥근 자갈들을 내보이더니 어느덧 모래바닥을 보이고 어두운 개흙까지 드러내고서야 멈춰선다 일렁거리며 한참을 더 생각하다가 그 물 천천히 돌아선다 사람들은 한때 가장 깊은 곳이었던 모래흙 위를 맨발로 걸어 멀리 갔다가 채 식지 않은 발자국을 따라 돌아나온다 해풍의 방향이 바뀌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묽은 바람이 묻어 있다 그때에도 바닷물은 꼼짝 않고 개흙과 모래바닥과 자갈들을 그곳에 새겨진 지울 수 없는 무늬들을 쳐다보기만 한다 어떤 후회들처럼 물빛이 짙어진다 어제보다 하루 더 힘을 쓴 낮달이 생각의 한 가운데를 지나가고 나갈 때와는 다른 한 덩어리 물이 이제 들어오려고 한껏 웅크린 몸을 조여 놓은 울음들을 천천히 풀고 있다 (그림 : 문인환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