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고 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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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 인사동시(詩)/고 은 2017. 8. 27. 08:52
인사동에 가면 오랜 친구가 있더라 얼마 만인가 성만 불러도 이름만 불러도 반갑더라 무슨 잔치같이 날마다 차일을 치겠는가 무슨 잔치같이 팔목에 으리으리한 팔찌 끼고 오겠는가 빈손이 오로지 빈손을 잡고 그냥 좋기만 하더라 험한 세상 피멍 들며 살아왔다 조금은 잘못 살았다 너는 내달리기만 하였고 나는 풀잎 하나에도 무정하였다 인사동에오면 그런 날들 가슴에 묻어 고향 같은 골목들 그냥 좋기만 하더라 어찌 15년 20년 친구뿐이겠는가 인사동에 오면 추운 날 하얀 입김 서러워 모르는 얼굴들 어느새 정다운 얼굴이더라 인사동에 가면 한잔 술 주고받을 친구가 있더라 서로 나눌 지난날이 있더라 얼마 만인가 얼마 만인가 밤 이슥히 손 흔들어 헤어질 친구가 있더라 오늘밤은 아직 내일이 아니더라 성만 불러도 이름만 불러도 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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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 선제리 아낙네들시(詩)/고 은 2017. 2. 9. 14:07
먹밤중 한밤중 새터 중뜸 개들이 시끌짝하게 짖어댄다. 이 개 짖으니 저 개도 짖어 들 건너 갈뫼 개까지 덩달아 짖어댄다. 이런 개 짖는 소리 사이로 언뜻언뜻 까 여 다 여 따위 말끝이 들린다. 밤 기러기 드높게 날며 추운 땅으로 떨어뜨리는 소리하고 남이 아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의좋은 그 소리하고 남이 아니다. 콩밭 김칫거리 아쉬울 때 마늘 한 접 이고 가서 군산 묵은 장 가서 팔고 오는 선제리 아낙네들 팔다 못해 파장떨이로 넘기고 오는 아낙네들 시오릿길 한밤중이니 십릿길 더 가야지. 빈 광주리야 가볍지만 빈 배 요기도 못 하고 오죽이나 가벼울까. 그래도 이 고생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못난 백성 못난 아낙네 끼리끼리 나누는 고생이라 얼마나 의좋은 한세상이더냐. 그들의 말소리에 익숙한지 어느새 개 짖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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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 대보름 날시(詩)/고 은 2014. 6. 23. 16:25
정월 대보름날 단단히 추운 날 식전부터 바쁜 아낙네 밥손님 올 줄 알고 미리 오곡밥 질경이나물 한 가지 사립짝 언저리 확 위에 내다 놓는다 이윽고 환갑 거지 회오리처럼 나타나 한바탕 타령 늘어놓으려 하다가 오곡밥 넣어가지고 그냥 간다 삼백예순 날 오늘만 하여라 동냥자루 불룩하구나 한바퀴 썩 돌고 동구 밖 나가는 판에 다른 거지 만나니 그네들끼리 무던히도 반갑구나 이 동네 갈 것 없네 다 돌았네 자 우리도 개보름 쇠세 하더니 마른 삭정이 꺾어다 불 놓고 그 불에 몸 녹이며 이 집 저 집 밥덩어리 꺼내 먹으며 두 거지 밥 한 입 가득히 웃다가 목메인다 어느새 까치 동무들 알고 와서 그 부근 얼쩡댄다 (그림 : 조경덕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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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 딸그마니네시(詩)/고 은 2014. 6. 23. 16:21
갈뫼 딸그마니네집 딸 셋 낳고 덕순이 복순이 길순이 셋 낳고 이번에도 숯덩이만 달린 딸이라 이놈 이름은 딸그마니가 되었구나 딸그마니 아버지 홧술 먹고 와서 딸만 낳는 년 내쫓아야 한다고 산후 조리도 못한 마누라 머리 끄덩이 휘어잡고 나가다가 삭은 울바자 따 쓰러뜨리고 나서야 엉엉엉 우는구나 장관이구나 그러나 딸그마니네 집 고추장맛 하나 어찌 그리 기막히게 단지 남원 순창에서도 고추장 담는 법 배우러 온다지 그 집 알뜰살뜰 장독대 고추장독 뚜껑에 늦가을 하늘 채우던 고추잠자리 그 중의 두서너 마리 따로 와서 앉아 있네 그 집 고추장은 고추잠자리하고 딸그마니 어머니하고 함께 담는다고 동네 아낙들 물 길러 와서 입맛 다시며 주고받네 그러던 어느 날 뒤안 대밭으로 순철이 어머니 몰래 들어가 그 집 고추장 한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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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 섬진강에서시(詩)/고 은 2014. 6. 23. 11:51
저문 강물을 보라. 저문 강물을 보라 내가 부르면 가까운 산들은 내려와서 더 가까운 산으로 강물 위로 떠오르지만 또한 저 노고단(老姑壇) 마루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강물은 저물수록 저 혼자 흐를 따름이다. 저문 강물을 보라. 나는 여기 서서 산이 강물과 함께 저무는 것과 그 보다는 강물이 저 혼자서 화엄사(華嚴寺) 각황전(覺皇殿) 한 채 싣고 흐르는 것을 본다. 저문 강물을 보라. 강물 위에 절을 지어서 그 곳에 죽은 것들도 돌아와 함께 저무는 강물을 보라 강물은 흐르면서 깊어진다. 나는 여기 서서 강물이 산을 버리고 또한 강물을 쉬지 않고 볼 따름이다. 이제 산 것과 죽은 것이 같아서 강물은 구례(求禮) 곡성(谷城) 여자들의 소리를 낸다. 그리하여 강 기슭의 어둠을 깨우거나 제자리로 돌아가서 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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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 귀성시(詩)/고 은 2014. 6. 23. 11:42
고향길이야 순하디 순하게 굽어서 누가 그냥 끌러둔 말없는 광목띠와도 같지요 산천초목을 마구 뚫고 난 사차선 저쪽으로 요샛사람 지방도로 느린 버스로 가며 철들고 고속도로 달리며 저마다 급한 사람 되지요 고향길이야 이곳저곳 지나는 데마다 정들어 또 더러는 빈 논 한 배미에 밀리기도 하고 또 더러는 파릇파릇 겨울 배추 밭두렁을 비껴서 서로 오손도손 나눠 먹고 사양하기도 하며 굽이치지요 삼천리 강산 고생보다는 너무 작은 땅에서 오래도록 씨 뿌리고 거두는 대대의 겸허함이여 자투리 땅 한 조각이라도 크나큰 나라로 삼아 겨우 내 몸 하나 경운기길로 털털 감돌아 날 저물지요 어느새 땅거미는 어둑어둑 널리는데 이 나라에서 왜 내 고향만이 고향인가요 재 넘어가는 길에는 실바람 어느 설움에도 불현듯 어버이 계셔야 해요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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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 해연풍시(詩)/고 은 2014. 6. 23. 11:30
옛노래는 누가 지었는지 모르고 노래만 남아 있다. 저녁 풀밭이 말라서 비린 풀 냄새가 일어나고 처음부터 말떼는 조심스럽게 돌아온다. 여러 산들은 제가끔 노을을 받아 혹은 가깝고 혹은 멀다. 또한 마을처녀가 밭에서 숨지는 햇살을 가장 넓은 등에 받고 이 고장에서 자라 이 고장에서 시집갈 일밖에는 생각지 않는다. 아무리 어제의 뭉게구름이 그토록 아름다왔을지라도 그 구름은 오늘 바라볼 수 없으며 벌은 날아가다 죽는다. 이 땅에 묻힌 옛피가 하루하루를 그들에게 가르치며…… 아직 밭 일꾼과 귀 작은 소떼와 처녀들이 돌아오지 않은 채 화북(禾北) 마을의 갈치배는 희미꾸레한 돛을 올리고 제 마음에 따라 다른 바다를, 그러나 한마음으로 떠난다. 옛노래는 누가 지었는지 모르고 노래만 남아 있으며, 바다는 좀더 북쪽 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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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 소와 함께시(詩)/고 은 2014. 6. 23. 11:22
며칠 동안 건너마을 객토 품 파느라고 너를 돌보지 못했다 바람도 불던 바람이 내 피붙이 같아서 덜 춥고 여물도 주던 사람이 주어야 네가 편하지 내가 말린 꼴 수북히 주고 더운 뜨물 퍼주니 너는 더없이 흡족해서 꼬리깨나 휘두르는구나 이랴 띨띨 밥 먹은 뒤 바깥 말뚝에 매어 두니 소가 웃는다더니 바로 네가 좋아하는 것 알겠다 외양간 쳐내어 쇠똥무더기 검불에 섞었다 네 집 뒤쪽은 샛바람 막게 두툼두툼 떼적 치고 남쪽으로는 비닐창 달아내어 볕조각 들게 했다 따뜻한 날이라 송아지 두 놈 까불대며 다니며 무우말랭이 널어 둔 멍석 밟고 마구 논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잠자리 깨끗하면 얼마나 좋은가 그동안 네 엉덩이 누룽지깨나 덕지덕지로구나 마른 똥 긁어 떼어내니 이놈 봐라 곧게 서 있다 송아지 두 놈 논 쪽으로 먼저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