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고 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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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 자작나무숲으로 가서시(詩)/고 은 2013. 12. 23. 11:00
광혜원 이월마을에서 칠현산 기슭에 이르기 전에 그만 나는 영문 모를 드넓은 자작나무 분지로 접어들었다 누군가가 가라고 내 등을 떠밀었는지 나는 뒤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다 다만 눈발에 익숙한 먼 산에 대해서 아무런 상관도 없게 자작나무숲의 벗은 몸들이 이 세상을 정직하게 한다 그렇구나 겨울나무들만이 타락을 모른다 슬픔에는 거짓이 없다 어찌 삶으로 울지 않은 사람이 있겠느냐 오래오래 우리나라 여자야말로 울음이었다 스스로 달래어 온 울음이었다 자작나무는 저희들끼리건만 찾아든 나까지 하나가 된다 누구나 다 여기 오지 못해도 여기에 온 것이나 다름없이 자작나무는 오지 못한 사람 하나하나와도 함께인 양 아름답다 나는 나무와 나뭇가지와 깊은 하늘 속의 우듬지의 떨림을 보며 나 자신에게도 세상에도 우쭐해서 나뭇짐 지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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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 눈길시(詩)/고 은 2013. 12. 23. 10:59
이제 바라보노라 지난 것이 다 덮여 있는 눈길을 온 겨울을 떠돌고 와 여기 있는 낯선 지역을 바라보노라 나의 마음 속에 처음으로 눈 내리는 풍경 세상은 지금 묵념의 가장자리 지나온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 설레이는 평화로서 덮이노라 바라보노라 온갖 것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눈 내리는 하늘은 무엇인가 내리는 눈 사이로 귀 기울여 들리나니 대지(大地)의 고백(告白) 나는 처음으로 귀를 가졌노라 나의 마음은 밖에서는 눈길 안에서는 어둠이노라 온 겨울의 누리 떠돌다가 이제 와 위대한 적막(寂寞)을 지킴으로써 쌓이는 눈 더미 앞에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 (그림 : 신재흥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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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 허공시(詩)/고 은 2013. 12. 23. 10:55
누구 때려죽이고 싶거든 때려죽여 살점 뜯어먹고 싶거든 그 징그러운 미움 다하여 한자락 구름이다가 자취없어진 거기 허공 하나 둘 보게 어느날 죽은 아기로 호젓하거든 또 어느날 남의 잔치에서 돌아오는 길 괜히 서럽거든 보게 뒤란에 가 소리 죽여 울던 어린시절의 누나 내내 그립거든 보게 저 지긋지긋한 시대의 거리 지나왔거든 보게 찬물 한모금 마시고 나서 보게 그대 오늘 막장떨이 장사 엔간히 손해보았거든 보게 백년 미만 도(道) 따위 통하지 말고 그냥 바라보게 거기 그 허공만한 데 어디 있을까보냐 (그림 : 김윤종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