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정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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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 뒷모습시(詩)/정호승 2023. 7. 26. 23:25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 아름답다고 이제는 내 뒷모습이 아름다워졌으리라 뒤돌아보았으나 내 뒷모습은 이미 벽이 되어 있었다 철조망이 쳐진 높은 시멘트 담벼락 금이 가고 구멍이 나 곧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제주 푸른 바닷가 돌담이나 예천 금당실마을 고샅길 돌담은 되지 못하고 개나 사람이나 오줌을 누고 가는 으슥한 골목길 담쟁이조차 자라다 죽은 낙서투성이 담벼락 폭우에 와르르 무너진다 순간 누군가 담벼락에 그려놓은 작은 새 한마리 포르르 날개를 펼치고 골목 끝 푸른 하늘로 날아간다 나는 내 뒷모습에 가끔 새가 날아왔다고 맑은 새똥을 누고 갈 때가 있었다고 내 뒷모습이 아름다울 때도 있었다고 (그림 : 김구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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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호승 - 연꽃구경시(詩)/정호승 2020. 9. 2. 14:52
연꽃 피면 달도 별도 새도 연꽃 구경을 왔다가 그만 자기들도 연꽃이 되어 활짝 피어나는데 유독 연꽃 구경을 온 사람들만이 연꽃이 되지 못하고 비빔밥을 먹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받아야 할 돈 생각을 한다 연꽃처럼 살아보자고 아무리 사는 게 더럽더라도 연꽃 같은 마음으로 살아보자고 죽고 사는 게 연꽃 같은 것이라고 해마다 벼르고 별러 부지런히 연꽃 구경을 온 사람들인데도 끝내 연꽃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연꽃들이 사람 구경을 한다 해가 질 때쯤이면 연꽃들이 오히려 사람이 되어보기도 한다 가장 더러운 사람이 되어보기도 한다 (그림 : 이석보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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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 길시(詩)/정호승 2019. 7. 29. 19:34
내가 걸어온 길은 내가 걸어온 길가에 놓인 낡은 의자를 사랑한다 그 의자에 잠시 앉았다 간 사람들을 더 이상 앉을 자리가 없어도 엉덩이를 밀치고 조금씩 자리를 내어준 사람들을 사랑한다 내가 걸어오면서 남긴 발자국에 고인 빗물을 빗물에 비친 푸른 하늘을 그 하늘을 가로지르며 사라져간 새들을 그리워한다 앉을 때마다 늘 삐걱거리기만 했던 낡은 의자에 그래도 봄눈이 내릴 때가 가장 아름다웠다고 먼 데서 날아온 풀씨들이 수줍은 듯 꽃을 피울 때가 자장 기뻤다고 삶은 어느날 동백꽃 한송이 땅바닥에 툭 떨어지는 일이었다고 오늘도 내가 걸어온 외로운 길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해질녘 막다른 골목길 독거노인의 낡은 의자에 앚아 풀꽃을 사랑하던 귀뚜라미를 그리워한다 (그림 : 이기우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