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성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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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선경 - 운주사 와불 앞에서시(詩)/성선경 2022. 10. 28. 09:39
저렇게 꽃피는 일이 천 년이라면 나는 아직 젊다 나란히 누워 하늘만 바라보며 또 천 년이라니 이제 마당 어귀에 꽃밭도 일구고 채송화나 봉선화를 심어도 좋겠다 어디 백반이나 구해와 손톱에 꽃물들이며 한 백 년 호호거려도 좋겠다 너 닮고 나 닮은 아이들을 낳아 장난기 가득한 돌탑이들 일흔 개나 여든 개 세워놓고서 나란히 팔베개를 하고 별자리나 찾으며 한 계절을 넘기면 또 어때 한 번 꽃피는 일이 이렇게 천 년이라면 나는 아직 젊다. (그림 : 심수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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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선경 - 그냥시(詩)/성선경 2021. 3. 6. 08:27
네게 불쑥 건네고 싶은 것 그냥,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고 지나가듯 그냥, 아무리 살아봐도 이유를 알 수 없는 그냥, 네게 휙 안겨주고 싶은 그냥, 고양이처럼 꼬리치며 안겨 오는 그냥, 사랑이란 것도 때로는 다 부질없다 싶을 때 꺼내보는 그냥, 발버둥 쳐봐도 다 알 수 없는 삶 같은 그냥, 봄 햇살 아래 알종아리를 드러내고 싶은 그냥, 야옹거리며 내가 네게로 가는 마음 그냥, 목욕탕이 쉬는 수요일 같은 그냥, 왜냐고 묻지 않는 그냥, 아무에게나 내 속을 털어놓고 싶은 그냥, 한시도 내게서 떨어나가 본 적 없는 그냥, 밥 한 그릇을 잘 비운 것 같은 그냥, 우리네 삶의 종착지 같은 그냥, 길고양이 같은 그냥, 그냥 그렇게 산다 싶은 그냥, 불쑥 오늘 너에게 또 건넨다! 그냥. (그림 : 장용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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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선경 - 취우(翠雨)시(詩)/성선경 2019. 7. 23. 18:06
함양 상림을 따라가며 수묵으로 펼쳐진 연(蓮)밭 청개구리같이 보기 좋다. 또르르르 구르는 빗방울이 이슬 같은 내 여름의 나머지다. 내 언제 저렇게 많은 옥구슬을 가져보았나 마음의 눈이 주머니같이 금방 불룩해져 개골개골 울음주머니로 부푼다. 정자에 앉아 툭 캔맥주 한 잔을 따는데 갑자기 이곳이 내 전생(前生)같다. 내 언제 이런 여유 가져보았나. 장마철의 햇빛 같은 내 한철의 나머지다. 다 마시고 나면 금세 찌그러지겠지만 아직은 반이나 남았고 노래라도 한 소절 부르고 싶다. 신들매를 단단히 매고 바쁜 이여 잠시 함양 상림에 들어 여기 전생(全生)을 보라 연잎의 물방울 아직 영롱하지 아니한가. 함양 상림 (咸陽上林) : 경남 함양군 함양읍 운림리 349-1 천연기념물 제154호. 면적 20만 5842 m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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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선경 - 검은 소로 밭을 가니시(詩)/성선경 2019. 4. 21. 10:25
어둡지 않은가 여기 지금 꽃은 봄비에 젖고 여윈 봄날은 용서 없이 간다네. 너는 꽃빛의 풍경을 두르고 나는 젖은 우산을 걷네 어둡지 않은가 여기 너는 강물을 휘돌아 주막에 들고 나는 소잔등을 때리며 밭을 가네 봄비는 꽃잎을 적시고 나는 젖은 풀잎으로 소를 몰며 이려, 이려 쟁기의 보습을 드네 어둡지 않은가 지금 여기 소는 꼬리로 파리를 쫓고 나의 눈길은 꽃에 머무네 밭은 여기서 저기까지 팔백 평 내 마음은 두세 꽃에 머무네 어둡지 않은가 여기 지금 사랑은 머무는 것이 아니라 노랫가락처럼 지나가는 것이라 너는 강물을 휘돌아 주막에 들고 나는 소잔등을 때리며 밭을 가네 너는 가고 나는 밭을 가네 쟁기의 보습은 무겁고 그대 봄날은 나비같이 가벼워 어둡지 않은가 여기 꽃은 봄비에 젖고 여윈 봄날은 용서 없이 간..